서부경남의 유월민주항쟁, 그날을 떠올리다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한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11톤 LPG가스 차량 두 대를 탈취해 시위 중이다. (사진 = 서부경남지역 6월 항쟁 약사, 진홍근)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한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11톤 LPG가스 차량 두 대를 탈취해 시위 중이다. (사진 = 서부경남지역 6월 항쟁 약사, 진홍근)

오는 6월 10일은 6월 민주항쟁 34주년 국가기념일이다. 진주, 사천 등 경남 서부권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1987 유월민주항쟁 유적지 답사 행사 ‘유월민주항쟁 서부경남 진주길 따라’ 를 6월 12일(토) 오전 9시부터 진주교육지원청에서 또 한 번 진행한다. 6월 항쟁 34주년을 맞아 1987년 유월민주항쟁 당시 진주에서 시위를 이끌었던 허철수 신부(진주가좌동성당, 정의구현사제단)와 진홍근 (사)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의 대담을 싣는다.

 

대담자

허철수 (현)천주교 진주가좌동성당 신부, (현)정의구현사제단, (전)민주주의민족통일서부경남연합 의장.

진홍근 (사)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 신부님을 뵈니 1987년 6월의 거리가 눈앞에서 삼삼히 떠오릅니다. 당시 신부님께서는 사천성당 주임신부로 계시면서 오태열 목사님(사천중앙교회) 등 개신교 목회자들과 연대하여 사천성당에서 ‘군정종식과 직선제 개헌을 위한 공동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지방 소(小)도시에서 매우 드문 일인데, 먼저 사천의 유월항쟁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허철수 신부
허철수 신부

: 당시 사천성당에서는 농가부채 탕감과 KBS수신거부 플래카드를 양쪽 세로로 길게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개신교는 한편에서 신군부정권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는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목사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천에서는 군정종식과 민주화를 바라는 목사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태열 목사님이 10여명의 진보적인 목사님들과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사천성당과 사천중앙교회를 오가며 공동기도회를 열었습니다.

: 그 와중에 당시 삼천포경찰서가 현직 공무원 신분의 장로 등 신도를 내세워 사퇴 압력을 가했고, 이로 인해 사천에서 목회를 그만둔 목사님도 계신다고 하던데.

: 제가 1989년에 진주 하대성당으로 발령이 났는데, 마침 그 근처에서 1987년 당시 사천교회 김상인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별 말씀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당시 경찰이 김 목사께서 사천과 진주를 오가며 유월민주항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데 대한 보복으로 신도를 통해 사퇴압력을 넣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오태열 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진보적 목사님들이 모여 경찰과 신도로부터 사과를 받고 김 목사님이 원할 때까지 목회를 한다는 합의도 있었지만,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 지경에 이르러 목회를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현재) 돌아가신 것으로 압니다.

: 신부님께서는 고 김영식 신부님, 허성학 신부님, 배진구 신부님 등 여러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경남 서부권의 유월항쟁에 관여하고 참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 늘 말씀하신대로 유월민주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간의 민주화 운동이 축적된 산물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유월항쟁 전에 어떤 경험을 하셨습니까?

: 제가 광주가톨릭대학교 5학년 때 1980년 5월 광주학살 현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후 신부가 되어서 광주학살 비디오를 십여 개 구매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웃음) 1987년 5월인가에는 고 김영식 신부님과 함께 진주 옥봉성당에서 광주비디오 상영과 사진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주시 금산면 관방마을에는 <농민운동기념비>라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비문에는 “1976년 가톨릭농민회 경남협의회의 결성으로 … 1985년 불량 종자 피해보상운동, 고성·진주 소몰이 시위 등은 … 전국으로 확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제가 가톨릭농민회 지도 신부로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 1987년 6월 10일 경남에서는 마산 3‧15의거탑에서 결집해 시위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이곳을 봉쇄하고 있어서 마산 어시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당시 무엇을 하셨습니까?

: 경찰들이 사천성당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6‧10대회 사흘 전에 빠져나와 다른 성당에 숨어 있다가 당일에는 3‧15의거탑 근처 극장에 숨어 있었습니다. 때가 되어 3‧15의거탑으로 나가다가 저와 몇몇 신부님들이 경찰에게 잡혔습니다. 경찰에 집결 장소가 유출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정한 장소에서 그렇게 잡혀가는 것이 아마 우리 신부들의 역할이었을 겁니다. 학생·시민들이 이날 시위를 키워가던 중에, 경찰이 한국-이집트 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던 마산공설운동장에 최루탄을 쏘자 관중들이 최루탄을 피하다 시위대와 합류했습니다. 이날 시위는 이렇게 대규모 시위가 됐습니다.

: 고성군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는 고 김영식 신부 묘소가 있습니다. 백두현 고성군수에 의하면 고성 출신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많다던데 어떤 분들이 계신지요? 또 지난 4월 고성군에서는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를 열었는데, 한국빈민운동의 대부이자 유월항쟁을 이끈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를 역임한 제정구 전 의원도 천주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 김영식 신부님을 비롯하여 저와 허성학 신부님, 배진구 신부님, 허성규 신부님, 채동호 신부님, 이재영 신부님 그리고 그밖에도 여러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또 고 제정구(1944~1999)의원은 유신정권 때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고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도 활약하였습니다.

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 명동성당은 1911년 105인 사건 밀고와 1937년 일제찬양미사 등 드물게 흑역사가 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KBS TV를 통해 생중계되던 성탄 자정미사 강론 도중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라고 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음모를 비판했다)과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등 7~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데요. 유월항쟁 당시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요?

: 1987년 5‧18 7주기 추모미사와 1987년 6월 10~15일의 명동성당 농성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함으로써 4‧13호헌조치 이후 유월항쟁이 확산되는 변곡점을 이루었고, 명동성당 농성은 유월항쟁의 전국적인 구심역할을 하였습니다. 김승훈 신부의 폭로 이후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신부님들이 처음으로 단식농성을 하였고, 부산 시위 군중들이 6월 16일부터 부산가톨릭센터에서 농성하는 등 유월민주항쟁에서 한국 천주교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할 것입니다.

: 최근 함세웅 신부께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톨릭도) 보수 개신교 대형교회의 모습을 벤치마킹하는 것 같다면서 더 이상 (가톨릭은) 민주화 성지가 아니라고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순행과 역행을 거듭하는 진행형임을 인정할 때 한국 민주주의에서 한국 천주교의 현실과 역할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민주화 과정에 가톨릭이 보탠 피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지학순 주교와 여러 신부님들이 군사독재라는 가시벌판에 정의구현사제단의 고고지성을 울린 뒤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1987년 감옥살던 이부영 전 의원이 양심적인 교도관들을 통해 전달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의 진술을 정의구현사제단과 가톨릭을 통해 바깥 세계로 알릴 수 있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함세웅 신부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저도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다, 아니다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면이 있습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으로 다 해석될 수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민주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이뤘다 해서 역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1960년 4월 민주항쟁, 1980년 유월민주항쟁, 2017년 촛불탄핵이 근 30년을 주기로 계속되는 거겠지요. 함세웅 신부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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