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날씨가 풀렸다고 합니다. 겨울 날씨 더러 풀렸다는 말은 한다만, 여름 날씨가 풀렸다는 말은 처음 듣는지라 낯설기도 했는데, 일면 풀렸다는 말이 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도록, 그렇게 지독하게 더울 수가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설마 그토록 오랫동안 더울 줄은 몰랐습니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전반적으로 무기력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추석 덕담이 있음에도, 추석까지 비지땀을 삐질삐질 흘렸으니, 햇곡식으로 명절음식을 해먹기조차 싫었습니다. 그러고는 홀연히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가을이 오기는 왔는데, 온갖 벌레들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논에는 멸구가, 밭에는 각종 애벌레가 때를 만난 듯싶습니다. 특히 이모작 벼를 심은 논은 전체가 피해를 입은 논도 있고, 상당 부분의 논이 군데군데 폭탄을 맞은 듯 멸구가 먹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도 그렇더니, 확실히 고온다습하면 벼멸구는 전성기를 맞게 되나 봅니다.
봄에는 냉해를 입어 모판을 두어 번 엎고도 결국은 육묘장에서 모를 사서 심은 집도 있고, 모가 모자라서 남의 집 모를 얻어다 심은 집도 있는데, 수확 직전의 논이 폭탄을 맞고 있으니 망연자실합니다. 폭염 끝에 찾아온 폭우는 더는 기대할 것도 없이 곳곳의 벼를 납작하게 눕혀 버렸습니다.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9월 초에 심은 배추면 진초록색을 띄며 제법 잎이 나풀거려야 하는데, 밭마다 엉망입니다. 예년 같으면 어린 배추 모종을 심어놓고서, 뿌리가 활착하기를 기다려 1차 방제를 해주면 별 무리 없이 잘 컸습니다.
그런데 예상 못 할 9월 고온과 가뭄에 어린 배추 모종이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어 죽은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렵게 자리 잡은 배추도 며칠 사이에 배추 좀벌레가 속을 다 갉아먹어 기형 배추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모종을 다시 구해서 두 번 세 번 심은 집들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종묘상마다 ‘배추 없습니다’라고 써 붙여 놓습니다. 모르긴 해도 올겨울 김장할 때가 되면 또다시 배추 파동이 생겨날 듯싶습니다.
가물 때는 죽도록 가물고, 더울 때는 또 대책 없는 더위가 지속되고, 비가 내릴 때는 짧은 시간에 몽창 내려서 비 피해를 입게 되는 기후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도 날씨도 양극단에 이르러 중간이 없습니다. 농사를 통해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후, 또는 이상 날씨로 농민들이 가장 직격탄을 맞고 있는데, 농정당국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벼멸구주의보를 날리는 일을 하고 있네요. 맞아요. 농정은 벼멸구에 관한 한 가장 긴급한 대응을 합니다.
농민들 살림살이가 걱정돼서일까요? 설마요, 아마도 수급 불안정 문제가 초점이겠지요. 정말로 농민들 삶이 걱정된다면 각종 농업문제에 대해서 지금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는 않겠지요. 아 물론 대책이라고 내고는 있지만 현장과 동떨어진 내용이 상당수입니다.
기후위기 대응 관련해서 제일 황당한 주장은 중부지방에서도 바나나나 애플망고 등 아열대 농작물을 심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습니다. 스마트팜 얘기도 귀에 안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이지 기후위기와 관련된 대책을 농민과 같이 고민하는 테이블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별 농민이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공적 체계는 이럴 때 가동되어야 할 일이지요. 참 애타는 시절입니다.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