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선선한 아침저녁에나 농사일이 가능한 폭염의 계절입니다. 게다가 아직 남은 장마에 곳곳에서 피해가 생겨납니다. 몇십 년 몇백 년 만의 폭우라 하니 자연은 참 두렵습니다. 그래도 농민들은 이 시기에나 여러 단체마다 한마당 행사나 각종 수련회 등을 많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재정사업도 이 시기에 많이 합니다. 행사비용도 많이 필요하고 사람도 자주 모이니 가능한 일이지요.
조직을 관리하는 데에서 재정은 사람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그만큼의 비용이 드는데, 사람이나 일만 보고 재정부담을 않으려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재정의 들고 남을 훤히 꿰뚫는 자가 최고의 지도자이지요. 재정사업을 기피한다면 큰일을 못하거나 안 하려는 속셈입니다.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분이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하니 큰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공금을 마련하는 일을 으뜸에 놓아야 하겠지요. 구차해 보이지만 절대 구차하지 않은 일이 바로 자금마련을 위한 재정사업입니다. 일단 이 관점을 중심에 놓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지요.
그래도 단체의 재정사업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노동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소득이 일정하게 들어오지도 않거니와 영세하기까지 하니 회원들의 회비로 단체의 운영비나 활동비를 쓰기에는 빠듯합니다. 예전에는 후원주점 같은 것을 많이 했는데, 요즈음은 그것도 시들합니다. 대신 판매사업을 많이 진행합니다. 그것도 여성단체에서나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요. 남성 중심의 단체들은 대규모 후원을 많이 받는지 어쩐지 자질구레한 판매사업은 선호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성단체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이나 식료품 등을 대량으로 값싸게 구매해서는 회원들이나 주변에 팔아서 조금 남는 이윤으로 재정을 충당합니다. 주로 미역, 김, 다시마 등 부피나 무게가 작고 나르기 좋은 물품이 사랑을 많이 받지만, 단기간에 반짝 많이 팔리는 새우젓 같은 것도 인기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물품 판매를 하자고 하면 회원들이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
나이 들수록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어려운데,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부탁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물품 판매를 하는 단체도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다른 뾰족한 방도가 없으니 또 판매사업을 합니다. 이번에 우리는 화장지를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공동 물품 판매 능력은 그 사람의 힘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수준이 이 대목에서 딱 드러납니다. 더러 타인이 주는 부담도 기꺼이 감당해온 사람들은, 역으로 타인에게 부담을 떠안길 수가 있지만, 자신 방식으로만 살아오면 누군가에게 부담을 안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업을 더욱 싫어하지요. 또는 남이 주는 부담은 떠안고 살아왔더라도 남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 자체를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판매사업이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도 기꺼이 그 부담을 안으며 판매사업을 하는 것은 여성들이라서 할 수 있는 사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큰 부담을 떠안은 사람에게 십시일반 해서 부담을 나누는 연대의 마음을 잘 가지니까요.
남에게는 부담을 지우기 싫고, 재정사업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기는 해야 하는 상황에 할 수 있는 일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사는 것입니다. 썩는 물건이 아니니 창고에 쌓아두고 쓰려는 심사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일은 화장지를 여러 뭉치 사게 되면 남편들이 잔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값을 먼저 주면서 물건은 다른 공간에 놔두면 안 되냐고 부탁하는 이도 있고, 남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쌓아둔다고 말하는 이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또 변했지만, 아직도 소비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긴 어렵기도 하나 봅니다.
예전에 시어머니께서도 마을회관에서 냄비나 이불 같은 소소한 살림을 사고서는, 한 며칠 후에나 물건을 보여줄 때가 있었습니다. 그 옛날 여성의 소비가 존중받지 못하고 일일이 간섭받던 시절의 습관이 아직 남아서는, 자식 앞에서도 자유로운 소비활동을 하기가 어려우셨나 봅니다. 문제는 지금도 그런 관습이 남아서 조심스러운 소비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부담을 안고도 화장지를 덜렁 사주는 분들이 고맙고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모인 재정은 여성농민을 위한 활동에 귀하게 써야겠지요.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