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지방도 이제 일모작 모심기는 거의 끝나갑니다. 이모작 모는 아직 이르지만요. 마늘이나 사료용 풀을 들이고서 논을 장만한 후 모를 심어야 하니까요. 서리가 일찍 내리는 윗녘과 달리 남녘은 서리가 늦으므로 여러 가지를 셈하여 모내기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예전에는 하지 무렵에 모를 심으면 수확량이 제일 많다고들 해서 그 무렵에 심었는데, 지금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한 달 사이에 들판이 완벽한 변모를 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농민의 위대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월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일을 하다가도 저 일도 해야 하고, 저 일도 해가며 또 다른 일을 머릿속에 담아야 계획했던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농사일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인식의 차이라 할지 습관이랄지 모르겠지만 부부간에 좀 차이가 있습니다. 남편은 중요한 일만 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중요한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자 하고, 나머지는 후순입지요.
가뭄이 시작됐는데 호박의 성장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물을 좀 주자하는데 역정을 냅니다. 모내기가 우선이지 다른 것을 어떻게 신경을 쓰냐고 하는 것입니다. 모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한 해 먹을 양식인데 모내기부터 하는 것이 맞지만, 모내기야 이앙기로 심으니 두 시간이면 충분한 일인 것이고, 그에 앞서서 스프링클러를 설치해놓고 일을 하는 것이 지당한 것 아니겠냐며 따박따박 설명을 하니 계획에 없던 일이라 조금 귀찮은 모양새입니다. 더 젊은 날에는 이만한 일로도 들판이 떠나갈 듯 싸웠지만, 이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다 싶었는지 연에 나의 뜻에 따랐습니다.
물주기나 추비하는 일 같은 관리의 영역은 여성들이 때를 잘 맞춥니다. 잠이 무척 달콤하기만 하던 젊은 시절에 애를 낳아 기를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밴 습관이겠지요. 아니, 나의 경험치만 축적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랜 세월 동안, 출산과 육아 등에서 훈련돼 온 여성들의 태도가 유전되어 내려온 것이겠지요.
아이를 키우는 공간이 위생적인지,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안전한 곳인지, 적절한 영양공급을 할 수 있는지 등 한꺼번에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살피면서 살아온 수십, 수백만 년의 삶이 유전자에 인식되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되었다고 하지요?
반면 남성들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합니다. 그래서 전문성이 발휘되는 직업에 남성의 활동이 두드러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기질이고, 둘은 때때로 조율돼야 하겠지요. 물론 시대에 따라 개인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기본 전제입니다.
흔히 건축을 종합예술이라고도 하던데 농사야말로 진정 종합예술에 속합니다. 논밭의 기초를 관리하는 일은 토목에 가깝고 창고나 집을 관리하는 일은 건축에, 흙의 물성을 아는 일은 토양학과 궤를 같이하고 작물관리는 생물과 화학을 좀 알아야 하지요. 굳이 구분하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지식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농사를 할 수 있는 듯해도 결국은 3월에서 10월, 8개월 동안 작기에 따라 이런저런 농사를 최대 두 번, 또는 한 번 짓는 것인데, 그걸 기호에 따라, 최근에는 지역 기반에 맞게 지어내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매번 찾아옵니다. 그때 일의 순서는 누가 정해야 할까요?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요?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