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민 약사
황규민 약사

11월 어느 날, 과메기 먹자고 뱀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봉곡동 오죽광장 근처 과메기 전문 식당 <은행나무>에서 만났다. 후배 한 명이랑 셋이서 자리를 잡았다. 조금 지나자 시끌벅적 모든 자리가 꽉 찼다. 주문 후 찾으러 오는 손님도 많았다. 과메기는 만족스럽게 먹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술이 조금 모자랐다. 2차 갈 데를 이야기하던 중 누군가가 시내 <다원>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과메기집이 시끌벅적한 곳이라면 <다원>은 조용한 곳이다. 이름 그대로 찻집 같은 분위기다. 커피도 있고 맥주도 있는 곳이다. 다양한 종류의 고급 맥주가 있다. '카스'나 '테라'에 적응된 나의 입맛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것들이다. 두 사람은 맥주를 시켰다. 나는 갑자기 독주 생각이 났다. 술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 고흐가 마시고 귀 잘랐던 술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사장님은 "압생트요?"라고 확인해주었다. 같이 간 친구는 깜짝 놀라며 "압생트? 압생트를 여기서 파는구나! 진주에 압생트 파는 곳이 있구나!"를 연발했다. 친구도 압생트 한 잔을 추가 주문했다.

압생트는 전설의 술이다. 오해와 소문과 뻥이 혼재된 술이다. 술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었거나, 화가 고흐의 전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생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압생트를 구경했거나 마셔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판매 금지된 술이었고, 너무 독해서 술에 약한 사람은 입에 갖다 대기도 코로 향을 맞기도 고약한 술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가 70%를 넘기도 한다. 소독용 알코올이 70%이니 말 다한 것이다. 모든 독주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뭐 이런 게 있지?' 하다가도 마시다보면 매력에 빠진다. 중독이라 할 수도 있겠다. 빈센트 반 고흐, 에드가 드가, 오스카 와일드,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등이 그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다.

압생트는 18세기 말 스위스의 쥐라 산맥에서 처음 만들어진 증류주다. 서양 향쑥, 아니스, 민트 등의 향신료를 첨가하여 특유의 녹색과 향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860년대 이후 프랑스 포도밭에 필록세라(포도 해충)가 만연하여 포도밭의 3/4이 괴멸되었다. 와인 가격이 엄청나게 급등하였고... 값싼 압생트에 물을 타서 마시는 서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러나 점차 독한 술 압생트에 익숙해졌고, 섞는 물의 양이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일상적으로 독한 술을 마시는 이들이 늘어났고, 알코올 중독이 확산되었다."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탐나는 책 出/ 미야자키 마스카츠 지음) -

큰 인기 비결에는 술 자체의 독특함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당시 유럽에 확산된 포도 해충 전염병이 한몫했다. 와인 등 술값이 폭등했다. 저렴하고 매력적인 압생트는 가난한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에게 딱이었던 것이다.

압생트는 20세기 초 정신병과 중독, 범죄,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받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금지되었다. 쑥에 들어있는 '투존'이라는 성분이 환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럽연합이 정한 투존의 안전 상한선이 35ppm인 반면 압생트의 투존 함량은 10ppm임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다. 안전 상한선을 넘기 위해서는 압생트 몇 병을 마셔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알코올 때문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투존은 이미 '마티니'의 재료 '베르무트'에도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생트가 치명적 독성을 띠고 있다는 소문이 난데에는 압생트 판매량이 와인 판매량을 초과하자 이를 경계한 프랑스 와인 업자들의 로비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 다음 백과/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판매가 금지되자 압생트는 신비의 술, 욕망의 술, 환상의 술이 되었다. 숨어서 마시는 술이 되었다. 합법화 첫날 추종자들은 줄을 서서 구매했다. 그러나 환각은 없었다.

"압생트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은 바로 압생트 금지령이었다."

압생트는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에서 금지되었지만, 유럽은 1990년대부터 합법화되었고 미국은 2007년에 합법화되었다.

내가 압생트를 찬양하거나 음주를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쓸쓸하거나 외로울 수 있고 또 마음이 시릴 수도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있다. 그럴 때 금지 약물에 손대는 거보다는 "소주와 국밥이 있는데 마약을 왜 해?"라는 가수 성시경의 말처럼 합법적인 압생트 한 잔쯤은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압생트와 같은 술은 힘 조절에 실패하면, 들어갈 때 기억은 남아 있지만 나올 때 기억은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압생트는 기분도 좋았고 나올 때의 기억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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