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북사동 진료소장 지낸 박구경 시인
유고시집 〈진주형평운동〉 형평문학상에

홍창신 칼럼리스트
홍창신 칼럼리스트

북사동은 진주와 사천이 경계로 삼은 두량못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둘러붙은 마을이다. 거기 보건진료소에서 36년을 소장 소임으로 녹아 산 이가 박구경 시인이다. '진료소가 있는 풍경'이 공무원 문예대전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으며 북사동은 박구경과 함께 두루 알려졌다.

한가락하는 서울의 문사들이 겨끔내기로 북사동을 댕겨갔다. 박구경은 천릿길 찾아온 이 노객들 시봉에 지극정성이었고 진주의 동류들은 함께 어울렸다. 구중서, 신경림, 민영, 박시교, 정희성, 김영재, 황명걸, 박이엽, 배평모 등 유명짜한 원로의 육필이 진료소 골방 방명록에 먹빛 '모'를 심어갔다. 부인이 경상대 교수라 진주에 자주 드나들던 채현국 선생까지 합세하니 한때 북사동은 김광섭의 성북동에서 '북'을 따고 천상병의 인사동에서 '사'를 취해 합쳐진 듯한 내음을 풍겼다. 우리는 으레 그 명사들과 동석해 변두리 국외자의 응어리를 풀었다. 그 중 특히 박이엽·구중서 선생과의 만남은 두고 기릴 소중한 기억이다. 박이엽 선생은 독학의 번역가로 문학·음악·미술· 종교를 자유자재하는 독보적 문필가다. 시인 황명걸은 "내가 소월이나 청록파 시인들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오장환과 설정식으로 뛰어가 있었고 내가 워즈워스나 롱펠로의 전원적 교훈시를 읊조릴 때 그는 마야콥스키나 예프투셴코의 진취적 시를 노래했다. 내가 하이든·모차르트의 감미로운 선율에 젖어있을 때 그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같은 현대의 무조음악에 관심을 가졌다"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내가 본 선생의 자세 어디에도 그런 명성의 흔적은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이따금 나직한 소릴 낼 뿐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여윈 몸피에 밭은기침으로 힘들어했지만 귀골에 안광은 형형했다. 선생은 고요한 응시자였다. 인상적이었다.

구중서 선생은 '광산'이란 호가 걸맞은 풍채 당당한 거인이다. 느리고 어눌한 어투의 문장을 끝까지 힘 있게 밀고 나가는 이 어른은 두주불사의 대주객이다. 얼굴만 불콰해질 뿐 어조나 자세엔 미동도 없으니 어지간한 젊은이들이 호기롭게 대작했다가 몇 합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진다. 백담사를 수행처로 삼아 '만해축전'으로 울림을 준 호쾌한 오현 스님의 표현이 압권이다. "너른 뫼(廣山) 선생은 명동성당 같은 곳에서 만나면 앞면은 그곳 종지기 같고 뒷모습은 성직계 같다. 그런가 하면 가야산 해인사 같은 곳에서 만나면 앞면은 그곳 방장 같고 뒷모습은 부목 같다. 선생의 서화는 산진수회처의 정자와 묵향이고, 장구는 함몰만 모래펄에 앉았던 기러기떼가 날아간 자리에 있는 울음이다."

박구경은 그들이 피워내는 문향을 즐겼고 거기 취한 채 네 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녀는 진료소장직을 정년퇴임하고서야 자신의 봄날이 슬며시 쟁여진 북사동에서 일어났다. 진주여고 앞에 거처를 잡고 오래 구상해온 진주 백정에 관한 서사 시집에 매달렸다. 그러나 출판을 목전에 둔 지난 봄 갑자기 세상을 놓았다. 유고집이 된 시집 박구경의 <진주형평운동> 출판은 미수의 구중서 선생이 끝까지 함께 살폈다. 선생이 표사를 쓰고 내가 발문을 썼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형평문학상 지역상 수상자로 박구경 시인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봄날의 북사동을 생각한다. 그녀는 먼저 간 박이엽, 채현국, 황명걸, 박노정 형들과 줄담배를 피우며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르며 잔을 부딪고 있을까. 그곳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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