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벚꽃이 아홉 번 피었다가 졌다. ‘벌써’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왔고 어디만큼 살아낸 것일까. 적어도 기성세대에게 학교는 ‘애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교육을 관장하는 국가는 애도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아라!’ 가르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주입되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세상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판을 거듭해서 깔아주었다.

국가는 애도하지 않는다. 국가에게 국민과 시민, 흩어진 객체, 알아서 생존해야 할 뿐인 개인의 죽음이란 치워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죽음은 가뿐하게 지워지고 주검은 즉각 치워진다. 새벽에 말끔하게 청소된 거리는 ‘안전하고 건강한’ 국가의 위선과 겹을 이룬다. ‘코로나19’도 그렇고, 아홉 해 사이에 이태원 참사도 그랬다. 애도는 없으며 스스로 관리에 골몰할 뿐이다.

‘세월호’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을까. ‘애도는 새로운 자기 체험이 생겨날 수 있게 한다 (베레나 카스트).’고 했지만, 애도는 곧장 가로막히고 왜곡 당하기 일쑤다. 죽음을 빠르게 치워버리고 원인과 해결을 봉인에 붙이는 폭력의 내장을 외면하면, 타인의 고통에 단지 연민의 감정으로 서성이고 마는 자신과 만날 뿐이다. 길들이고 있는 이 도시의 뒷골목에서.

이소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은, 기억하기 위해서 진실을 끌어내 세우기 위해서 오히려 잘 지내겠다는 어머니들의 ‘자랑’이다. 그것은 잘나겠다는 인간적 욕망과 되물림과 반성과 ‘같이’에서 다시 시작되는 자랑이다. 그 속살에는 희석되지 않는 슬픔과 싹을 단단하게 품은 분노의 씨앗과 그것을 살아내는 생활의 알짬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는 있는 그대로 되기보다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들의 <장기자랑>은, 무대와 연기 속에서 보이지만 틀을 가질 수 없는 삶의 연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로막는 것들은 모든 삶을 틀에 가둔다. 단원고등학교에서의 <장기자랑>이 끝나고 학생들이 어머니들을 안는다. 이제는 국가가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애도를 터득해가는 것일까. 그런 몸짓은 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 <장기자랑>은 끝나지 않은 자랑이다. 아직 완전하게 자랑이 될 수 없는 미완의 자랑이기도 하다. 언제 우리는 정말로 자랑하는 자랑을 보게 될까. 그 자랑으로 분노를 해결할 수 있을까. 벚꽃이 다 날린 허공에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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