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출마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씀일 테다. 이 말은 매번 해대는 발린 소리라, 아니꼬우면서도 행여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비쌔는 태도로 곁눈질하게 만드는 마성의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난다 긴다 하는 인사들이 죄 이런 구호를 외치는 이유일 게다.

그러나 나는 살아난 경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누구도 못 살렸으니 여태 살리겠다, 왜장치고 있는 거 아닌가.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는 살아난 경제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잘 모르는 채 경제를 살리겠단 선동에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고마문령(瞽馬聞鈴: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듣고 따라간다)이라. 경제 살리기는 어느 순간 이렇게 우리의 워낭이 되어버린 듯하다. 막연히 부자 만들어준다는 소리 정도로 여기며 따라가는 게 아닌가 싶다.

저들이 그토록 부르짖을 만큼 우리는 정말 가난할까? 잠깐 밤거리를 한 번 거닐어보자. 길을 가득 메운 차들, 높직높직하게 솟은 빌딩숲, 휘황한 야경. 저녁을 먹지 않았다면 잠시 식당이나 편의점에 들러 늦은 저녁을 먹어도 좋다. 넘쳐나는 가게, 상품들. 우린 사실 엄청난 풍요 속에 살고 있질 않나. 그럼에도 우리는 왜 계속 결핍을 느끼며 더, 더한 풍족함을 갈구하는가?

우리가 잠시 밤거리를 거닐며 만난 거의 모든 것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상품은 부를 함의하고 있다. 욕망을 일으키되 충족은 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설계된 물건들. 세상은 온통 상품과 상품광고로 넘쳐난다. 장례마저 상품이 된지 오래지 않은가. 그만큼 부를 향한 욕망은 증폭된다.

거기에 더해 미디어, 정치선동 따위들은 언제나 우리를 더, 더, 더한 욕망을 향해 달려가도록 부추긴다. 상품을 향한 욕망엔 사상도 도덕도 없는 양 호도한다. 더 많이 소유할 수 있으니 만족하면 안 된다고 내몰아간다. 내 결핍의 이유는 나일뿐, 다른 이유는 없으니 그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착취하도록 유도한다.

욕망은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만큼 커지는 자기무력감과 비례해 더욱 커져만 간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의 전제는 경제의 죽음 내지 죽음에 준하는 악화다. 위기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위기감은 자기희생을 정당화, 강화한다. 우리는 정말 지친다. 이런 상황에 언제 죽었는지도 몰라 조문도 못 갔던 경제를 살려 부자가 되도록 해주겠다는데 혹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간 그렇게 경제를 살리겠다며 국회든, 청와대든, 어디든 들어간 사람들이 과연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대기업, 재벌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들로 일관했다. 소위 성장 위주의 경제 살리기다. 이런 정책은 빈부격차만 더 키웠다. 그들의 방법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재화가 넘쳐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경제는 분배의 경제이거늘, 되레 매번 성장만 내세우고 있으니, 해결될 리가 있나. 부자들의 돈놀이, 아메바 같은 자본의 무한증식을 위한 방편을 경제, 그 자체인 냥 호도하고 그들에게 공적 자산편취를 돕는 일 따위를 정치라 이야기하는 정치인들 좀 솎아내자, 더 이상 속지 말고.

덧붙여, 나날이 더해가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는 이런 인간경제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방증하는 지표다. 이런 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금은 성장이 아니라 분배, 더 나아가서는 안정적인 후퇴를 이야기해보아야 할 때다. 그들의 워낭소리를 따라가는 맹목적인 눈먼 소는 되지 말자. 저들의 경제는 우리의 경제가 아니다. 우리의 경제는 인본주의에 기반한 기여와 연대에서, 우리 삶을 지탱하기 위한 생태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미래가 있을 것이다. 코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현명한 판단들 하시길.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정말 다양한 후보들이 있다.

 

                                                                     박훈호 자유기고가
                                                                     박훈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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