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 역사 공원 청원 했으나 행정 ‘모르쇠’
자랑스러운 지역 역사 알리기 진주시 나서야
진주를 대표하는 ‘형평운동’, '진주3.1운동'을 이끌었던 백촌 강상호 선생의 묘소 일대가 여전히 방치된 것으로 드러나, 진주시의 지원과 관리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강상호 선생의 유해가 묻힌 새벼리 언덕은 왕복 6차선으로 도롯가에 위치해 통행이 어렵고 독립운동가 예우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이곳(가좌동 산 93-7)에 묻혀 있다.
묘소 입구에는 오랜 기간 햇빛에 노출되어 빛바랜 보랏빛 표지판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표지판 모서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고의로 찢은 듯한 채로 바닥이 일부 드러나 있다.
묘역 안으로 들어서자 201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보인다. 주변에는 인근 주민이 가꾸는 듯한 작은 텃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노끈으로 겹겹이 줄을 쳐두었고, 물조리개와 고무대야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묘역 앞에는 임시로 갖다 놓은 듯한 어정쩡한 위치에 강상호 선생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며 가좌 주민들이 1915년에 세웠다는 ‘시덕불망비’가 놓여 있는데, 비석 뒷면은 이미 오래전에 부서져 비문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져있다. 심지어 비석 가 쪽으로 굵은 금이 가 있어 지금 당장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임혜련 국장은 “‘시덕불망비’는 신진주역 개발 당시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며 “단지 강상호 선생의 어머니로서뿐만 아니라 지역의 소중한 역사 자원이 방치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강상호 선생의 묘소를 뒤덮고 있어 오랫동안 사람이 다녀가지 않은 듯한 느낌이 역력하다. 묘소 앞 낡아버린 조화가 처연함을 더한다.
백촌 강상호 선생은 1957년 이곳에 안장되었고 비석 하나 없이 50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강상호 선생의 묘소에 이정표 하나 없는 것이 씁쓸했던 김장하 선생은 1999년 “백촌강상호지묘(栢村姜相鎬之墓)”,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 라는 문구를 새겨 남몰래 비석을 세웠다.
백촌은 만 20살이던 1907년에 경남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여해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백촌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형평운동에 힘을 쏟던 시기에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진주 지역 간사를 맡았고 1920년 설립된 노동자 권익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활동도 이어나갔다.
그의 이러한 항일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해방 이듬해 1월에 결성된 진양(진주) 3·1 동지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강상호 선생은 출옥 후 백정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1923년 4월 24일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 등과 함께 형평사를 조직했다.
그는 형평사 초대 사장을 맡아 백정 차별은 부당하고 불의하며 조선 전체의 해악이라며 백정들의 인권을 보호할 것을 호소했다.
오랜 기간 백촌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면서 그의 업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강상호 선생은 정작 자신도 모르게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강상호 선생의 아들 강인수 씨는 2023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백촌 일가의 불어닥친 곤궁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도망자의 삶을 살며 떠도는 동안 우리 가족은 산속에 숨어 옛 형평사 동지들의 지원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했다. 나 또한 학교장 주선으로 학비 면제를 받아 고등학교(옛 진주농림고)는 마칠 수 있었지만, 대학 진학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형평사 등 사회운동에 전념하느라 빚을 져 촉석루 앞 12대문집이 경매로 넘어간 지 오래였고, 해방 뒤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어머니께서 패물을 팔아 겨우 진주 봉곡동 기와집을 마련했지만 결국 이마저도 잃고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시민들의 오랜 염원, ‘형평운동’ 역사 공원, 기념관 설립 추진
지난 2023년 진주시는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며 형평운동의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으나 시민들은 전시 행정에 그쳤다며 제대로 된 형평운동 역사공원과 형평운동 기념관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2005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강상호 선생 묘역 역사 공원화 사업 추진’을 위해 진주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고, 이듬해 강민아 의원이 진주시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의회의 답변은 “인물 1인에 대해서는 역사 공원을 추진할 수 없으며 이후 진주시의 역사공원 조성이 추진된다면 재논의 하자” 며 입장을 유보했다.
단디뉴스 취재 결과 진주시는 여전히 강상호 선생의 묘소 관리는 후손에게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진주시 공원녹지과 팀장은 “지방교부세 감소로 인한 예산편성의 어려움을 들며, 일 년에 두 번 정도 묘소 일대 벌초를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형평운동’ 안내판 교체, 역사공원 추진 등은 관련 부서가 없어 지원이 어렵다”며 선을 그었다.
현재 강상호 선생의 후손 강인수(88) 씨는 지난해 암 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해 대구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신진균 이사장은 “2006년 강상호 선생의 묘소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사람들이 후손을 설득해 진주에 남게 했다. 그런데 아직도 강상호 선생의 묘소 관리를 포함해 형평운동을 알릴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형평운동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릴 만큼 자랑스러운 역사인데도 ‘형평운동’의 발원지인 진주에서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해 매우 유감”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진주보다 도시 규모가 작은 밀양시의 경우에도 독립운동기념관과 독립운동기념 체험관, 의열기념관 등을 지원·관리하고 있다”며 “진주시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형평운동’을 기념할 방안을 시민들과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원가입 바로가기 → http://hpmove.com/bbs/board.php?bo_table=customer6
△ 농협 803-01-389307 (형평운동기념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