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진주고등학교 교사
김준식 진주고등학교 교사

최근 교육 ‘생태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의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천천히 짚어 본다.

여기서 ‘생태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이 ‘교육 생태계’를 표방한다. 이미 주류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조금 삐딱하게 이 용어를 생각한다.(일종의 의심이다.)

그 의심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생태계’라는 용어의 배후에 도사린 ‘자본주의’의 그림자, 이를테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이미지에 대한 우려:

1935년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탠슬리(Arthur Tansley)가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물질 전달의 중요성에 주목하기 위해 개념으로 처음 사용된 생태계(ecosystem)의 핵심은 ‘호환성(compatibility)’이었다.

생태학에서 ‘호환성’은 아마도 물질에 방점이 있었을 것인데, 이후 교육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면서 물질보다 더 확대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생태계’라는 단어에는 진화론적 사고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진화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사고의 체계 중 하나라고 본다면 자본주의적 ‘호환’은 강자 중심, 혹은 '지배층' 중심의 호환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있다. 여기에 부가하여 '살아남은' 것들과 '살아남을' 것들에 대한 것이 교육의 본질과 연결된다는 것도 나에게는 몹시 회의적인 부분이다.

2. ‘생태계’라는 용어를 상호의존성, 재생, 협력, 유연성, 다양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로써의 지속가능성을 기본 원리로 하는 생태학적 관점에 대한 의견:

풀을 찾아 1,600㎞(한반도의 거의 두 배)가 넘는 거리를 평생 이동하는 동물이 있다. 정식 명칭은 누(Gnu)이고 영어로는 Wildebeest라고 부른다. 아프리카 남동부 지역(세렝게티 평원 – 마사이족 언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의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소과 동물은 거의 수천 마리씩 떼 지어 움직인다. 떼 지어 강을 건너고 떼 지어 초원을 횡단하는 그들은 주변의 포식자들 사자, 하이에나, 표범, 치타, 들개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먹이를 제공해 주고, 다시 사라져 주는 존재들. 수 억년 동안 지속되었을 이들의 이동을 두고 학자들은 별별 가설을 다 세우지만 여전히 아무도 이동의 원인을 모른다. 오로지 누우 떼들만 알 것이다.

나의 관심은 누우 떼들과 사자를 비롯한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는 동물들의 관계다. 사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누우 떼들 중 새끼, 노쇠한 누우를 공격하여 먹이를 얻는다. 비정하지만 누우 입장에서는 무리의 규모 조절 측면에서 유용한 방법이다.(이것도 협력이라면 협력일 수 있다.) 어차피 멀리 움직이는 이들의 본능으로 볼 때 낙오자들 탓에 속도가 느려지고 속도가 느려지면 목초지를 얼룩말이나 다른 영양 무리들에게 뺏기게 된다.(유연성) 이 문제점을 사자가 해결해 주는 것이다.

강을 건널 때는 악어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먹이를 제공한다. 따지고 보면 아프리카 남동부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해 주는(지속가능성) 존재들이 누우 떼들이다.

상호의존성 또한 누우 떼와 목초지, 사자, 하이에나. 악어로 한정한다면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누우 떼와 사자 무리, 악어 사이에 오고 가는 ‘호환성’이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지속(지속가능성)해온 이런 ‘생태계’가 교육에 모티브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나의 잘못된 분석이기를 간절히 빈다.

3. “모든 생명은 특정한 ‘생태계’ 내부에서 존재한다. ‘생태계’는 특정 지역의 생물군과 무기적 환경 요인이 종합된 복합 체계를 의미한다. 생명체는 ‘생태계’ 내부의 다른 생명체, 나아가 무생물적 조건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 진화한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교육을 둘러싼 여러 사회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며, 또한 학교 교육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령에게 말 걸기』 김진경 외, 문학동네, 2014.

앞 문장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이어지는 문장에 있는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에서 조금 생각이 다르다. 성장 진화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저자의 취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생태계’라는 아이디어를 교육에 가져오려는 논리적 비약에 반대하는 것이다. ‘문화적 조건’이나 ‘사회’라는 단어의 광범위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도대체 교육이라는 범주 안에서 성장이나 진화, 이 거대 담론의 근거로 ‘생태계’를 가져오는 것은 또 다른 해석의 문제와 적용의 문제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로 이야기를 끝낸다.

미미한 나의 의심으로 끝날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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