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Covid-19)는 유령이 아니다. '변이'로 개명한 그것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도는 엄연한 실존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만날 수 있고 모일 수 있다 해도 실내에서 마스크는 지금도 벗을 수 없다.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많은 걸 앗아갔고 계속 앗아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랬듯 국악과 헤비메탈을 접목해 세계적인 밴드로 우뚝 선 잠비나이에게도 코로나는 악재였다. 2019년 세 번째 앨범 '온다(ONDA)'를 내고 이듬해 80회 공연 월드 투어를 계획 중이었던 그들은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서 끝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했다. 제한적 온라인 활동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그들은 그렇게 2년여를 온다간다 기약 없이 보냈다.

그리고 맞은 2022년 11월 11일. 이들은 지구인들이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어둠의 세월을 위로하기 위해 검청색 미니 앨범 한 장을 들고 오랜만에 음악팬들을 찾았다. 타이틀은 '발현(發顯)'. 속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즉, 잠비나이라는 팀이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이 앨범이길 바라는 멤버들의 마음이 저 말 속엔 있다. 또한 거기엔 코로나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온 지 꼬박 3년을 맞는 시점에서 잠비나이가 우리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응원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앨범 '발현'엔 잠비나이의 밴드로서 거듭남과 사람들의 생활인으로서 복귀 의지가 함께 있는 셈이다.

여태껏 잠비나이의 소리란 예술적 간접 경험으로 현실의 일상을 직시하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그들 음악에선 현세와 내세가 공존했고 집단 사회와 개인 사유가 뒤엉겼다. 그런 잠비나이가 흐를 때 듣는 사람은 시간에 박제된다. 박제된 청자는 이성을 잃은 이성, 감성을 밀어내는 감성이 어떤 것인지를 저들 음악에서 배운다. 잠비나이가 엮어내는 소리는 슬픔에도 박력이, 분노에도 자비가 서려있다. 어둡되 거칠고 아련하되 파괴적이다. 그들에게 웃음과 희망이란 울분과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발현'의 영어 제목은 'apparition'. 유령, 환영이라는 의미다. 좀 오싹해진다. 그래서인가. 재킷 사진 속 설산은 한글 제목과 영어 제목이 지닌 뉘앙스(드러남과 공포)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곡은 모두 네 곡으로,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가 참여한 곡이 있는 앞 두 트랙은 비교적 짧은 4~5분대에 머무는 반면 나머지 두 곡은 각각 9분 22초와 7분 39초에 이르며 조금은 길고 심오한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첫 곡은 '저기 저 차가운 밑바닥에서 다시'다. 제목이 암시하듯 노래의 화자는 지금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빛으로 손을 뻗는 중이다. 휘모리 장단으로 기어를 넣은 심은용의 거문고가 뭉툭한 파장을 일으키는 사이 김보미의 해금이 귀신처럼 들어오고(fade in) 여기에 최재혁의 드럼, 유병구의 베이스가 맞불을 놓으면 마지막 이일우의 기타와 피리가 가세하며 곡은 가뭇없게 폭발한다. 뜻이 있음에도 뜻을 지우며 번지는 세 명의 코러스(이일우, 김보미, 심은용)는 주문인지 기도인지 모를, 그럼에도 구체적인 읊조림으로서 코로나라는 암흑에 갇힌 인류의 구원을 갈구한다(이 갈구는 혼돈으로 치솟는 이일우의 샤우팅으로 매듭짓는다). 이렇듯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5인조는 두려워할 수 없는 것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느끼는 것 마냥 자신들의 악기를, 음악을 연주한다.

한바탕 소리의 아비규환이 지나간 자리엔 선우정아의 서늘한 독백으로 문을 여는 '지워진 곳에서'가 들어선다. 고래처럼 우는 해금이 촉발시킨 헤비메탈의 절규. 최재혁(드럼)의 플레이는 이내 시들어버리는 그 짧고 굵은 절규의 부재 속에 군대식 행진 리듬을 보태며 곡의 장면 전환을 끄집어낸다. 동시에 아직 할 말이 덜 끝난 선우정아의 존재감이 불거지고, 그의 목소리가 짊어진 곡의 운명은 스토너 록(Stoner Rock)과 국악이 모던 팝의 덫에 걸리는 모양새로 일단락 된다. '지워진 곳에서'는 '저기 저 차가운 밑바닥에서 다시'와 함께 코로나를 통해 지옥과 천국을 맛본 사람들의 마음을 가감없이 표현했고 또 어루만져주었다.

가사가 있던 앞선 두 곡과 달리 나머지 두 곡 '두 날개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와 '이토록 거대한 어둠 속 작은 촛불'은 말이 없는 연주곡이다. 만약 음악이 빚어내는 공포와 감동이란 것이 무언(無言)에서 비롯된다 말할 수 있다면 저 말 없는 두 곡엔 말이 있는 두 곡과는 다른 차원의 감흥이 녹아있다. 거대하고 장엄한 포스트 록의 위엄으로 "위대한 실패, 미완의 성공에 대한 헌사"를 감행한 '두 날개가 잿빛으로 변할 때까지'의 을씨년스런 선율과 팽팽한 구성을 들어보라. 이는 그대로 다음 곡 '이토록 거대한 어둠 속 작은 촛불'로 이어지며 이 작품이 미니 앨범이라는 작은 형식을 띠면서 콘셉트 앨범이라는 큰 그림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누설한다. 해금을 비롯해 조금씩 기지개를 켜며 번져 들어오는 밴드의 연주. 특히 곡이 3분 가까이 흐른 뒤 가미되는, 마치 90년대를 주름잡은 미국 얼터너티브 록 밴드 스매싱 펌킨스의 곡 'soma'를 연상시키는 이일우의 무기력한 기타 리프는 이내 노곤한 피리와 조우하며 록과 국악이라는 이 밴드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곡이 시작되고 5분 여가 지나 발화해 6분대 후반에서 최재혁의 즉흥 드럼 연주를 신호로 치열하게 산화한다.

근래 록은 죽었다, 록은 망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어설픈 진단이 기준으로 삼았을 주류, 대중성 면에서 보자면 아마 재즈 같은 장르는 죽어도 수 백 번은 죽었으리라. 이상하게 사람들은 다른 장르들엔 관대하면서 유독 록만 죽이려 든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만 듣고 사는데 잘 듣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꾸만 애먼 장르 하나를 사체로 만들어 부검까지 하려 든다. 이는 백 보 양보해도 그 장르를 애청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록만 하(려)는 뮤지션들의 의지와 꿈을 갈갈이 찢는 무책임한 관종적 진단으로 밖엔 볼 수 없다. 나는 되지도 않는 그 말이 얼마나 섣부르고 편협하고 무모하고 공허한 말인지 잠비나이와 배드램 같은 팀들의 새 음악을 들으며 분명히 깨달았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