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20

잠을 깼다. 곤히 잠든 아내가 깰까봐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한기로 가득하다. 찬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내려서자 겨울별자리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천지사방이 고요하다. 입춘(立春)이 닷새도 남지 않았다.

다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내일이 설날이다. 명절이 와도 딱히 갈 곳이 없다. 명절차례를 없애고 기제사만 지내기로 한 탓에 부산 큰집에 갈 일도 없다. 이 나이에 처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은 집 안팎을 청소하고 명절음식 만드는 아내를 도와야 한다. 해마다 그래왔듯 제사가 없어도 아내는 명절음식을 만들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열 마지기 넘는 농사를 올해도 다 해야 하나. 밭두렁에 울타리콩을 심으면 풀이 덜 자랄까. 올해 대통령 선거가 걱정이네.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하지만 법집행이 공정하지 않은데 선거로 어찌 세상을 바꾼다는 거야.

주제 넘는 걱정으로 아침을 맞는다.

- 08:10

아침이 바쁘다. 날이 밝기 무섭게 마을 위쪽 정토회 지리산수련원 고양이들 사료를 챙겨준다. 고미와 꽃분이가 따라나선다.

아들이 처가에 가고 없으니 카페 고양이들도 내가 돌봐야지. 내려가는 계단 삐걱거리는 소리에 고양이들이 마중을 나온다. 카페에도 고양이가 많이 늘었다. 걱정이다. 사료를 여기저기 뿌려주고 빈 물그릇에 물도 채웠다. 뒷마당 덤벙이와 꼬꼬들 먹이 한 줌 뿌려주고 물그릇도 채웠다.

바깥일 마무리하고 들어오니 아내는 떡국을 끓였다. 내일이 설날이지만 오늘 떠나는 민박손님도 미리 떡국 맛보라고 일부러 끓였다고 했다. 닭고기와 두부를 넣은 경상도식 떡국이었다. 달그락달그락 수저소리가 따뜻하다.

어린 시절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닭을 한 마리 잡으셨다. 닭을 뼈째 다지듯 썰어 항아리에 절여두었다 떡국을 끓일 때마다 한 줌씩 넣었는데 불현듯 그 맛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 09:50

앞마당과 뒷마당을 청소하고 창고를 정리했다. 뒷마당 닭장 주변을 정리하는데 닭 한 마리가 갈고리 끝을 따라다녔다. 그 닭을 바라보노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지난핸가 이른 가을 태풍이 몰아치던 밤이었다. 나무더미 위에서 밤새 온몸으로 태풍을 맞아 죽어가던 닭이었다. ‘죽으면 묻어줘야지’하며 닭장을 나서다 퍼뜩 헤어드라이기가 생각나 그 닭을 헤어드라이기로 말려주었다. 이후 거짓말처럼 살아나 지금까지 저렇게 살아있는 닭이었다. 내가 저를 살렸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가끔 내 곁을 맴도는 것도 신기했다.

닭장 옆 잡동사니를 모아둔 창고를 치우는데 구석에 달걀이 서너 개 모여 있었다. ‘어라, 닭이 아직도 알을 낳네’ 겨울에 접어들면서 닭은 알을 낳지 않았다. 늙어서 못 낳는 것이겠거니 했다. 며칠 전 마당으로 나와 꽃밭을 헤집고 다니는 닭이 ‘구구’거리는 소리를 내자 아내는 닭이 알을 낳으려나보다고 했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늙어서 못 나을 거라고 했다. 알은 싱싱했다. 비록 몸은 늙었어도 봄이 오자 생식본능으로 알을 낳는 듯했다.

뒷마당 닭장 앞 소금창고는 고양이가 못 들어가게 다시 새 그물을 쳤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 11:30

청소를 마쳤다. 민박손님을 배웅하고 들어가자 아내는 이런저런 전 꺼리를 챙기고 있었다. 집에서 명절차례도 안 지내지만 해마다 설 추석 명절이면 명절음식을 장만해온 아내였다. 명절음식에 대한 추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탓이 크겠지.

마주 앉아 전을 구웠다. 먼저 생선전을 굽고, 깻잎반달전을 굽고, 꼬지전을 굽고, 다음으로 동그랑땡을 굽고, 이어 육전을 굽고, 마지막으로 녹두빈대떡을 구웠다. 아내가 먼저 소주 한 병 내오라고 했다. 며칠 전 배탈이 나 일주일째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명절이라 아내가 선심을 쓰는 거였다.

육전과 녹두전을 안주 삼아 소주를 몇 잔 마셨다. 해마다 시장에서 사온 녹두를 썼는데 지난해 녹두농사를 지어 올해는 우리 녹두를 썼다. 시장에서 사온 녹두는 샛노랬지만 우리 녹두는 파르스름한 색깔이었다. 아내는 우리 녹두전이 더 꼬숩고(고소하고) 차지다고 했다.

널따란 채반 두 개가 가득 찼다.

- 14:10

아내는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며 아래채 작은방으로 내려갔다. 텔레비전을 켜두고 손톱발톱을 깎았다. 어린 시절 설 전날이면 어머니께서 손톱발톱을 깎아주셨다. 그때는 손톱깎이가 없던 시절이라 가위로 잘랐다.

이젠 무얼 하나. 하릴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 마당으로 나왔다. 두렁이 이랑이 빗질을 해야지. 무슨 일이든 몸을 써야했다. 가만히 앉았으면 병이라도 날 것 같은 날이다. 늙은 몸이지만 마음은 설날을 하루 앞둔 날이다.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고, 산뜻하게 깎은 머리로 이웃 어른께 세배를 다니던 설날이 내일이다.

골목으로 나갔다. 빈 밭 건너 영남아지매 집 마당엔 서울 사는 아들이 왔는지 하얀색 자동차가 보였다. 뒷집 두부박샌댁은 자동차 두 대가 왔다. 가까이 사는 딸과 큰아들이 온 모양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지만 올 사람은 온다.

어린시절 우리 집 섣달그믐밤은 그야말로 그믐이었다. 아버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찾아올 사람이라곤 머나먼 여수 앞바다 조그만 섬에 사는 숙부였다. 어쩌다 그 숙부가 찾아오는 설날이면 우리 집도 설날다웠다. 꼬챙이에 낀 말린 바지락과 말린 갑오징어와 반건조생선을 바리바리 챙겨 오신 숙부는 수염이 관우처럼 길었었다.

두렁이와 이랑이가 멍멍거리며 문간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장성한 두 딸과 중년 어머니가 민박손님으로 와 문간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 설 손님이시다.

- 17:40

밭을 한 바퀴 돌았다. 올해 농사계획을 속으로 셈하며 개울건너 밭에서 산언저리 밭으로, 다시 지난해 우리가 장만한 우리 밭으로 휑하니 돌아오니 낯선 손님이 와있었다. 여행작가라고 했다. 며칠 민박을 하고 있는 미경씨가 초대했다고 한다. 미경씨는 지난해 우리 집에서 한달살이를 해 식구처럼 지내는 터였다.

앞마을 카페에 갔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불쑥 우리 집 밥이 맛있으니 꼭 먹으러 오라는 말을 남겼단다. 그렇다고 밥 한 끼 먹으로 왔을까. 명절이고 하니 마음도 적적하던 터라 발품을 판 거겠지. 몇 권의 여행서적을 내고, ‘세계테마기행’이라든가 하는 여행프로그램을 진행한 유명한 여행가였다.

여행이야기에 아내가 솔깃해 마주앉는다. 남미를 갔다가 인도를 갔다가 중국을 갔다가 유럽을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낮에 구운 전을 안주 삼아 권커니 잣것니하며 그믐밤을 보낸다. 민박손님으로 온 중년의 어머니도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넘기니 다 일가친척이요 형제자매처럼 따뜻하다.

- 21:30

아내는 일찍 잠들었다. 밤중에 눈이 내릴 거라 한다. 손전등을 들고 뒷마당 나무더미로 가보았다. 나무더미는 잘 덮여있었다. 바람이 거세지는 듯해 닭장 문을 닫아주었다. 마냥 어둡던 마을이 오늘밤은 환했다. 집집마다 창문에 불빛이 밝았다.

바깥마당 뒷마당 전등을 켰다. 바깥 화장실도 불을 켜두었다. 섣달그믐 어머니는 집안이 밝아야 한다며 등이란 등은 모두 켜두었다. 심지어 외양간에도 불을 켜두었다.

그믐밤 어둠이 가시고 집이 환했다.

새해엔 다 잘되면 좋겠다. 무엇보다 대통령선거가 잘 되면 좋겠다. 나라가 평화로워지고, 가난한 사람이 따뜻해지면 좋겠다. 권력의 칼날은 언제나 우리처럼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겨누지 않던가.

농사도 잘 되면 좋겠다. 보름이 카페도 사람이 많이 찾아주면 좋겠다. 아내를 위한 시간도 좀 만들어 봐야지. 군대서 안 좋아진 휘근이 허리도 올해는 좀 좋아지면 좋겠다. 우리 서하 바이올린 켜는 상상을 하니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내일이 설날이다. 내일 아침은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을 거라 한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