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에게 직접소득을 허하라!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절이 돌아왔습니다. 동지팥죽도 해 먹었고, 빈독에 넣어둔 홍시도 물러진 채 다 떨어져 가고, 동치미는 한창 맛이 들었습니다. 이제 통장에 공공비축미 정산대금만 들어오면 진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셈입니다. 돈이 들어오면 이자를 해결하는 농가도 있을 테고, 아니면 농약방에 밀린 외상값을 갚아야 할까요? 농가 살림 규모가 클수록 세밑이 무섭겠지요. 암요, 올 한 해도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처음 결혼하고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 선배 언니들이 여성농민을 무급 종사자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뜻을 몰랐습니다. 그냥 상징적으로 쓰는 말인가 싶었습니다. 같이 농사지어서 돈이 필요할 때 받아쓰는데 어째서 무급 종사자라고 하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빈곤하게 살던 학생 시절보다 훨씬 낫게 세 끼 따뜻한 밥 먹고 사는 살림이라니 무급 어쩌고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급 종사자라는 말을 정치적인 구호쯤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시간이 흘러 나의 온몸 마디마디가 조금씩 이상이 오도록 농사일을 했는데, 농기계가 늘어나고 창고가 커진 것이 무색하게 나는 여전히 무급 종사자로 있더란 말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대부분의 여성농민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요.

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어머니 세대 중 남편에게 돈을 타서 쓰는 사람은 차라리 나은 편이고, 숫제 남편에게 돈을 달라지 않는 사람들도 태반이었습니다. 내 돈은 내가 만들어서 쓴다, 즉 예전 같으면 시장에 가서 농산물을 팔거나 품을 판 돈이 나의 것인 정도? 요즘으로 치면 경매시장에 내놓지 않고 택배를 보낸 물량만큼은 내가 자유롭게 쓰는 정도였던 것이지요. 돈이 워낙 귀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정서가 그랬던 것입니다. 그 정서는 지금도 면면히 흘러서 대부분 남편 이름으로 농산물이 출하되고, 또 남편 통장으로 농산물 정산대금이 다 들어오니 여성들은 접근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몇몇 개인의 사정인 양 싶어서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물어보니 대부분 남편의 통장에 들어간 돈은 잘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 자신의 소득을 갖지 않는, 또는 스스로에게 결정권이 없는 경제주체는 제대로 된 사회구성원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힘은 경제력에서 나오는 세상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소득구조가 없이 그야말로 무급 종사자로 존재하는 한, 이 분야에서는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셈이지요. 아, 물론 남편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지요. 뻔한 농업소득에 생산비는 치솟고, 해마다 농사는 예측 불가능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농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생활편리를 위한 돈을 우선에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요. 그 부담을 누가 모르나요? 그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남편에게 손을 안 벌리고 살아왔던 것이고, 그것이 습관이랄지 관습이 되어 어머니들은 그리 살아오셨고, 우리 세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그 문화를 따르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젊은 여성들은 농업을 등지는 것입니다. 요양보호사나 식당 주방 일 등의 일터로 떠나니 전업 50대 여성농민도 만나기란 퍽이나 어려운 것이지요. 규모가 조금 큰 대농가들도 새로운 생업전선으로 여전히 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 얘기를 남편에게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러다가 여성농민에게 소득이 주어지지 않는 구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한, 한국 농업은 젊은 여성에게서 배제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고 누차 얘기하니, 그제야 비로소 눈을 크게 뜹니다. 남편이 이러할진대 세상은 또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얘기하려 합니다. 여성농민이 생산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은 현재의 농업 상황, 나의 노동이 직접 소득으로 연결되지 않는 삶, 이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농업정책의 삼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현실에 대해 주야장천으로 크게 말하려고요. 아, 물론 그간 여성농민 창업을 지원한다, 부업을 장려한다며 여러 정책을 시도하는 등 당국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시다시피 현장은 그대로입니다. 이를 중요한 의제로 삼는 한 해가 다가오길 바라는 세밑입니다.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