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혼자 사는 남성 노인들의 집에 더부살이하려는 여성 노인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온갖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하며 살림을 꾸려가거나, 마을주민들과 낯이 익을 때까지 두문불출하고서 살림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노인 돌봄 노동을 위한 재혼, 혹은 동거를 하게 된 것이고, 이는 마땅한 생활 수단이 없는 여성 노인들의 최후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자녀들이 사회성이 좋은 경우는 어머님 소리도 듣고 존중받으며 살았지만, 간혹 아버지의 재산을 어떻게 할까봐 잔뜩 경계하며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

잘 살면 다행이었지만, 괴팍한 어르신의 강짜 때문에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던 그 풍경이 사라진 것은 이른바 노령연금이 지급되면서부터라지요? 쥐꼬리만 한 최저소득이 생기면서부터는 이런 풍경이 급감하게 되었음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연구사례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남성 노인의 입장으로는 돌봄과 정서적 지지를 해줄 인력이 사라지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성 노인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최소한의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된 셈입니다. 말이 쉬워 같이 산다라고 하지만, 평생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고, 고착되어서 변화되기 어려운 성격을 맞추기란 또 얼마나 어려우며, 게다가 생활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살려면 얼마나 속이 많이 썩었겠습니까? 그런 곤란을 해결하고자 생겨난 것이 노령연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적긴 해도 좋은 일입니다. 어쨌건 매달 주어지는 고정수입이 주는 최고의 혜택을 여성 노인 빈곤층이 가장 많이 받는 셈일 것입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소득은 곧 힘이지요. 사람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냐, 없냐에 따라 삶의 양태에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 진리를 구현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습니다. 사실 여성 노인이 남성 노인보다 일을 적게 해서, 또는 방탕하게 살아서 재산이 적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반듯하게 살아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남성이 재산취득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에 놓여있는 것이지요. 임금의 차이나, 상속권(최근에는 많이 달라졌지만)에서나 전반적인 흐름이 그랬고 그 영향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특히 농촌 지역은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여전히 여성농민의 이름으로 농업소득이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법적 근거도 없이(‘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그 어디에도 남성·여성 구분이 없음) 남성이 주 경영자로 되어있고, 상대적으로 여성은 농업소득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대농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농업소득이 많지만, 오히려 여성농민이 실질적인 소득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농은 수입이 적어서 나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사는 것이 지구환경을 위해서 참 좋은 일이기에,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타자에게는 주어지는 권리가 자신에게만 아니 주어지게 되면 더없이 작아지고 위축되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정치·사회·문화·신용·교육·정보 등 삶의 전 사회영역에서 자신의 이름이 없이 살아가는 천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기후위기, 인건비 상승, 자재비 상승, 외부 고투입 농사 등으로 더없이 농업경영이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명의로 된 농업소득을 가지며 민주사회의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여성농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간혹 그런 여성이 있기도 한데, 그래서 개별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연소득 몇 억 단위의 고소득자에 대한 불평등 문제도 개별의 문제로, 개별의 능력 문제로 봐야겠죠? 주가를 조작하거나 지역개발 정보를 사전입수하여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도 개별 능력 문제이니, 뭐 세상에 흥분할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다음 달에 이어 씁니다)

 


* 이 글은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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