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 쓰는 말로 타자(他者)가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도 나를 잘 모를 때 자신도 타자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다. 그런데 타자는 ~이 아닌 존재라는 부정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아무튼 철학의 타자나 타자성(他者性)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과도 관련 있어, 나와 다른 무엇을 통해 자신을 찾게되는 이야기는 영화에서 원재료라 할 수 있다.

2011<심장이 뛴다> 이후 윤재근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유체이탈자>, 앞에서 말한 정체성이나 타자성과는 사실 그다지 상관이 없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자신을 지키거나 되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몸을 빌린다. 주인공 강이안(윤계상)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당연히 혼란스럽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먼저 왜 다른 사람이 되었는가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겠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씩 다른사람이 되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나란 놈이 누구인가를 아는 게 다른 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것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야기는 개연성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종의 초자연적 현상이고(물론 이상한 약물을 많이 맞았다) 설득은 알아서에 맡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알아서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결국 영화는 가 누구야?’ 보다,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본래의 나를 잡아 죽이려하니까.

그래서 본래 내가 어떤 놈인지도 알고 싶고, 왜 나를 잡아 죽이려 하는지도 알고 싶다. 아 죽이려 하니까 피해야 되고, 맞부딪치면 싸워야 한다. 목표는 내가 누구야?’ 보다 싸우!’ 이다. 시인과 촌장은 노래 <가시나무>에서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이 당신이 쉴 곳 없라고 했다. 내가 타인이나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어렵거니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보려고하는 것이 자아와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체이탈자>당신이 쉴 곳 없는 나보다 가 쉬고 싶은 나에 가깝다. 나를 되비치는 타자의 문제가 아니니까.

영화는 제발 다른 사람이 되지 말고 내가 되기 위해 달려간다. 달음박질 하려고 입은 옷은 액션이다. 이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결국 싸우는 것을 보는 재미다.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놈과 싸우는 것이다. 결국 내 안에 있는 너무나 많은 나’, 또는 쉴 곳 없는 당신때문에 괴로운 심정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잡아 죽이려 하니까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것. 그 절박은 이해하겠는데 살아남아서 해야 하는 것이 마뜩하지 않다. 잡아 죽이려는 이유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머릿속은 기억이 없는데 몸은 기억해서 잘 싸우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미 싸우는 기술을 많이 익혔고 많이 싸워봤기 때문이다. 강이안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쉬고 싶어 아주 잘 싸운다. 그가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고 살아가길바란다.

 

김한규 시인
김한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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