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진정국면으로 접어드는가 싶었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대구 신천지 교회 신도들의 집단 발병과 이동 경로를 따라 전국으로 퍼져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 와중에 신천지 교회는 자신들 종파가 비난받을 것을 우려해 ‘감염이 되더라도 신고하지 말라’고 권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두를 경악케 했다. 특히 감염이 의심되는 신도들이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경우까지 생기면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바이러스와 질병이 인간을 벌하는 신의 도구라 믿는 것까지는 그들의 자유에 속할지 모르지만, 대규모 전염병 확산을 막으려는 질병관리본부의 통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사회구성원으로서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천지가 기존 기독교 사상을 벗어난 이단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원칙을 지키기만 한다면 교리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타인의 가치체계나 머릿속 사상까지 간섭할 권한은 없으니 말이다.

▲ 서성룡 편집장

또한 신천지 교회가 하필 이때 대규모 집회를 열어 바이러스 확산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해서, 코로나19 유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덧씌워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닥친 위험과 불안의 책임을 쉽게 떠넘길 수 있는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다. 마침내 대상이 지목되면 즉시 저주와 혐오를 쏟아내고 사회울타리 밖으로 맹렬히 밀어내려 애쓴다. 처음엔 중국 우한과 중국인들의 음식문화에 대한 혐오로 시작해 나중엔 중국에서 돌아온 내국인들로까지 혐오의 대상이 넓어졌다. 그러다가 최근 한 친정부 논객은 바이러스가 퍼진 대구 경북지역과 그 지역 주민들의 정치성향을 ‘일본’에 빗대며 혐오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발과 비판여론이 높자 혐오의 과녁은 신천지라는 한 기형적이고 폐쇄적인 신앙집단으로 온통 옮겨가고 있다.

이런 양상은 가해자를 특정하기 힘든 사회적 참사나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공포로 몰아넣는 대규모 유행병이 생겼을 때 흔히 나타난다. 마치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엔 모든 비난의 화살이 살아남은 선장 한 명에게 집중됐다가, 선박 소유주인 유병언과 구원파로 옮겨가고, 다시 박근혜라는 무능한 컨트롤 타워에게 집중되는 현상과 닮았다.

사회적인 문제의 원인은 대개 사회경제 시스템 자체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삶을 지탱하는 구조를 바닥부터 뜯어고치는 일이 더 불편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씌워 속죄양 죄물로 만들 수 있는 ‘원흉’을 찾아내어 저주와 혐오라는 돌을 던지며 자신은 안전하다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세월호 사건은 신자유주의 가속 페달을 밟은 한국사회가 온갖 규제완화와 노동유연화, 무분별한 비정규직 양산 등의 결과로 빚은 사회적 참사였다. 거기에다 언론의 무책임과 구조당국의 안일함, 운항사의 탐욕, 위기관리 최종 책임자의 무능은 위험의 제동장치를 마비시켜버렸다. ‘생명과 안전’ 보다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우선하는 그 가속페달은 아직도 깊이 눌러져 있다. 그 짓눌린 가속페달로 인해 지금도 수많은 세월호가 산업현장에서 학교에서 침몰하고 있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마치 없는 일처럼 치부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어떤가? 인간의 자연 파괴와 무분별한 공장식 축산시스템, 이를 위해 저질러지는 항생제 오남용과 유전자 조작 등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성적인 과학자들 사이에서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대한 진단과 성찰은 쉽게 눈에 띄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모조리 뜯어 고쳐야 역진이 가능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 대신 ‘원흉’을 찾아 혐오하는 방법으로는 자기 기만적인 위안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손 자주 씻고 마스크 착용부터 철저히 하는 수밖에.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있다 싶으면 병원을 찾기보다 1339 콜센터로 전화부터 하는 매뉴얼에 따를 예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의심환자나 확진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돌아본다. 그가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없이, 피부색과 성 지향, 종교의 종류나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 사회 공공 의료시스템의 보호와 치료를 받아야 하는 동등한 환자로 여겨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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