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찾아서 -

모두가 지식인인 요즘. 참된 지식인은 누굴까.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긴 지식인을 찾아 뜨거운 여름의 햇살을 동무 삼아 집을 나섰다. 실천하는 학자였던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로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23) 선생의 흔적이 깃든 부사정(浮査亭)을 찾아 나섰다.

진주시 금산면 금산농협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빠른 길이지만 금호지(금산못) 쪽으로 에둘러 들어갔다. 부레옥잠을 비롯한 각종 수중 식물들이 못을 가득 메웠다.

 

▲ 진주 금산면 금호지

금호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라 때 형성된 자연 못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눈에 못 전체를 다 보지 못할 만큼 크다. 전제 면적 20만 4937㎡의 금호지 평균 수심 5.5m지만 워낙 깊어 명주실구리 3개가 들어갔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금산 못을 둘러봤느냐?”라고 묻는다고 한다. “안 둘러봤다”고 하면 게으른 놈이라고 벌을 내린다고 한다.

전설이 아니라도 언제 찾아가도 넉넉하게 반기는 곳이 금호지다. 금호지를 잠시 둘러본 뒤 사동마을 지나 관방마을로 가는 길에 망고개를 넘었다.

 

▲ 진주 금산면 사동마을에서 관방마을로 넘어가는 망고개

고개 넘어 관방마을에 이르면 정자나무 두 그루가 시원하게 그늘을 만든 곳이 보인다. 바로 옆에 <농민운동기념비>라는 표지석 서 있다.

경남 진주 농민운동사(史)를 담은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1년 11월 금산면 가방리 가톨릭농민회 연수원 앞 뜨락에 진주 농민운동사(史)를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1976년 가톨릭농민회 경남협의회의 결성으로 조직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쌀값 제값 받기와 농협 민주화 활동을 중심으로 활발히 일어났다. 1979년 규산질비료 강매시정운동, 1982년 진양협의회 부당 을류농지세 시정운동, 1983년 관방분회 수세 현물 납부운동, 1985년 불량 종자 피해보상운동, 고성·진주 소몰이 시위 등은 운동과제와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라고 적혀있다.

 

▲ 진주 금산면 관방마을 가톨릭농민회 연수원 앞마당에 있는 <농민운동기념비>

<농민운동기념비>를 뒤로하고 남성마을에 이르면 <아지매 화물>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부사정(浮査亭)이 나온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부사정 정문인 양직문 담장에 기대어 있다. 부사정은 1600년(선조 33년) ‘부사(浮査)’는 또는 야로(野老)로 불리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선생의 제자와 유림이 선생의 호를 따서 건립한 부사정사의 여러 건물 으뜸이다. 1785년(정조 9년) 반구정 외 17개 동이 불에 탔다. 지금의 부사정과 솟을대문인 양직문만 남았다.

 

▲ 진주 금산면 남성마을에 있는 부사정은 1600년(선조 33년) ‘부사(浮査)’는 또는 야로(野老)로 불리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선생의 제자와 유림이 선생의 호를 따서 건립한 부사정사의 여러 건물 으뜸이다.

1903년에 중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95년 반구정을 시작으로 지은사, 양동재, 지학재를 차례로 복원하고 2003년에는 담장과 석축을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부사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부사정의 건축물은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하지만 반구정을 포함한 건물 전체를 통틀어 ‘부사정’이라고 부른다.

 

▲ 진주 부사정 양직문 옆으로 양동재와 지학재 등이 있다.

양직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옆에 있는 사적비를 따라가면 양동재가 나온다. 양동재를 지나면 지학재가 나온다. 지학재 마루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잠시 들여다보고 몸가짐을 살폈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 내 양동재

지학재 뒤에 반구정이 있다. 1600년 부사정을 지은 그해 여름, 남강 가에 ‘반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반구정이라 적힌 편액을 보니 선생이 이름 지은 까닭이 떠올라 가져간 남명학연구원에 펴낸 <부사 성여신>을 찾아 읽었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 내 지학재 마루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잠시 들여다보고 몸가짐을 살폈다.

선생은 <부사집>에서 "날짐승은 삼백여섯 종류가 있지만, 최고로 신령스러운 것은 봉황인데 갈매기는 이런 덕이 없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앵무새인데 갈매기는 이런 능력이 없으며, 공격해 새를 잡는 것은 송골매인데 갈매기는 이런 재주가 없다. 덕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강호에 살기를 좋아하며 세상일에 뜻이 없는 것이 야부(野夫)의 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자가 이 이름을 얻은 것이 또한 알맞지 아니한가"라고 적었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 내 반구정

선생은 4세 때부터 총명해 "우리 가문을 빛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다”라며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문의 기대를 모았다. 19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뒤 사마시에 합격한 68세까지 향시에 합격한 것이 모두 24회나 되었다.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68세라는 늦은 나이에도 과거를 보려 한 까닭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평소의 포부를 한 번 펴 보고자 한 것"이라 선생을 <부사집>에 기록했다. 60대 후반까지 과거에 응시해 자신의 포부를 이루려 했지만 꿈은 이루지 못했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 내 지은사

지은사 옆으로 난 작은 문(門)을 지나 부사정에 올랐다. 가져간 책을 다시 펼쳤다. 선생의 흔적이 깃든 곳이라 책이 술술 읽힌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

스승 남명선생의 경의(敬義) 사상 본질이 사회적 개혁과 실천에 있음을 알고 지역사회에서 끊임없이 실천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금산동약’을 만들기도 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양전제의 폐해를 상소하기도 했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에 바라본 금산들녘과 남강

또한, 의리를 실천했다. "의리를 알지 못하고 문장에만 전념한다면 그 폐단이 크다"라며 의리를 중시한 그는 역모에 연루된 김덕령 장군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원통하게 죽은 수우당 최영경을 구명하기 노력했다. 영창대군 옥사로 귀양살이하는 동계 정온을 위해 상소하여 진상 규명에 나서기도 했다.

 

▲ 진주 금산면 양동재에서 바라본 부사정

1622년(광해군4)에 시작해 1632년(인조10)에 비로소 완성 경상도 진주목의 읍지인 <진양지>를 집필해 지역의 문화와 역사적 자산을 정리하기도 했다.

“강호에 한 늙은이 살고 있는데

학문을 해도 시대에 맞지 않아,

십 년 동안 비파 잡고 지내다 보니,

귀밑거리 하얗게 세고 바람만 쓸쓸하네.

농사를 지어도 풍년을 만나지 못해,

쌀독에는 남아 있는 쌀이 없어서,

안자처럼 빈한한 삶 굶주리는 날만 느는데,

걱정 없이 생업을 경영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이,

고서만 펴 놓고 읽으면서 자득해 하네.”

 

▲ 진주 금산면 부사정은 ‘부사(浮査)’는 또는 야로(野老)로 불리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선생의 제자와 유림이 선생의 호에서 따온 말이다.

부사 성여신 선생은 벼슬길에 나서 세상에 나아가 포부를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일생 배운 바를 실천하려 노력한 지식인의 삶을 엿보았다.

 

▲ 진주 금산면 부사정에 가면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23) 선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도움 책 : 남명학연구원에서 펴낸 <부사 성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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