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룡
서성룡

언제부턴가 새로운 만남, 새로운 관계가 꺼려진다. 어쩔 수 없이 부부동반 모임이라도 할라치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뒷걸음질 치고 빠져나갈 핑계 궁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던 젊은 날엔 새로운 사람이 늘 궁금하고 사람 몇 명이 모이면 금세 세상을 바꾸기라도 할 성 싶었다. 가슴도 뛰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 마흔 어느새 쉰 줄에 들고 보니 그런 게 다 부담이고, 때때로 역겹기까지 하다. 알던 사람들과 하던 거 하는 게 편해지는 거야 당연한데, 역겨울 것 까지는 뭔가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 자기만족적이고 보수화된 생활 습성을 변명하는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각종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놈의 관계론과 상황론을 듣고 보노라면 역겹다 못해 구역질이 오를 지경이다. “내가 아는 ㅇㅇ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말로 연막을 치다가 증거들이 나온 뒤에는 ”(좋은 혹은 정의로운 사람인데)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며 상황논리를 펴거나 피해자를 순식간에 원인 제공자로 만들어버리는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댄다.

내 눈엔 이런 것들이 그저 자신의 고정관념을 지키려는 무모한 똥고집, 또는 힘과 돈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조폭간의 의리로 밖에 안 보인다. 그러니 계급적 혹은 계층적 이슈 없이 그저 인맥 넓히는 목적으로 우르르 모이는 각종 모임들이 부담스럽다 못해 역겨운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 사건부터 시작해 지금도 끝나지 않은 조국 일가에 대한 이런 관계론과 상황논리의 반복재생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관계론에 의한 인간 맹종과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상황논리(혹은 꽃뱀 논리)는 이제 습관을 넘어 도덕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범죄사실을 비판하거나 가해자를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대번 ’내부 총질‘하는 배신자 낙인이 찍히기가 일쑤이다. 진영 안 가리고 비판하는 기자라면 ’기레기‘ 딱지 붙기가 영락없다.

우리 동네 진주에서 일어난 장애전담 어린이집 폭력사건도 마찬가지다. 원장이 사회 각종 조직과 단체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했던 인물이고 그런고로 인맥도 두터운 사람이다. 그 남편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조직의 수장이다. 그래서 일까. 지역사회에서 작은 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앞 다퉈 말하던 사람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특히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교육단체, 인권단체, 여성단체들까지.

몇몇을 제하고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소통의 장이란 허울을 입고 있는 이곳 온라인 세상 풍경은 이럴 때 더 을씨년스럽다. 그놈의 진영논리가 이토록 철통같이 지켜지는 공간이 또 있을까.

이러니 사람 아는 것이 역겹다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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