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룡 단디뉴스 이사
서성룡 단디뉴스 이사

요즘 들어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어쩌다 보게 되더라도 대충 흘려 읽고 말지, 꼼꼼히 챙겨 읽지 않는다. 모든 뉴스가 그렇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기사들이 진영논리에 ‘오염’됐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기사를 보며 불편해 하거나 반감을 갖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진영론에 오염된 뉴스를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피로감만 더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는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뉴스에 대한 거부감을 만든 것 같다. 착각은 금물이다. ‘진영론에 오염된 언론’이란 언론재벌 조·중·동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거칠게 나누던 ‘야당지’ ‘여당지’라는 말이 그렇게도 싫었는데, 이젠 언론에 대한 그런 몰상식한 구분조차 쉽게 부정하기 어렵게 돼버린 듯해 씁쓸하다. 이미 세상이 워낙 몰상식하게 돌아가고 있질 않나.

그 와중에 국제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의 천박한 말실수와 그것을 놓고 벌이는 진영에 갇힌 언론들의 해석과 역시 진영론에서 멀리 못 벗어난 논객들의 설전을 반강제로(이슈만 되면 관련 뉴스가 도배되다시피 하니) 듣는데, 유난히 대통령의 ‘국익’이라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소위 ‘바이든 혹은 날리면’ 논란을 집중 보도한 한 메이저 방송사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주니 마니 하는 논란(이 문제는 대통령 비서실의 좀스런 대응도 우습지만, 이걸 대단한 언론탄압인양 떠드는 것도 솔직히 낯 뜨겁다) 중에 대통령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거창한 ‘국익론’을 거론한 것이다.

‘그런 보도는 국익에 도움 안된다’라? 다시 말해 ‘나라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 말을 듣자니 이천오백년 전 맹자가 양혜왕에게 했다는 ‘어찌 이(利)를 따집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 일침했다는 고사도 생각나고, 국가의 본질을 심각하게 논했던 고래의 이런 저런 국가론이 머리를 어지럽힐 참이었다. 그런 거창한 논란은 제쳐두더라도, 대통령의 약점 혹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국익’을 논할 문제로 인식한다면, 혹시 윤대통령은 스스로를 ‘짐이 곧 국가’라고 말한 중세 유럽의 왕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언론브리핑을 하는 태도나 최근 화물연대 파업에 아무런 대화도 없이 ‘돌아가서 즉시 일하라’고 ‘명령’하는 자세를 보면, 이런 의심이 전혀 터무니없지만은 않을까 싶어 우습다 못해 살짝 무서워지려 한다. 무슨 블랙 코미디도 아니고.

여하튼 ‘국익’을 논하려면 먼저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일 텐데, 우리는 이미 ‘짐이 곧 국가’라는 왕권신수설을 넘고, 윤통이 그토록 사랑하는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 혁명을 넘어선지 오래다. 지금은 노동계급과 자본계급, 농민과 상인, 공무원, 학생과 교사, 여성과 남성, 청년과 노년 등 각계 계층의 다양한 이익과 정치적 요구들이 국회와 같은 다양한 국가기관의 틀 안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원칙 아래 상호 경합하고 타협한다는 다원론적 국가관에 가까스로 합의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국가기관인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장관도 ‘대한민국’이지만, 대통령과 그 부인의 치부를 드러내 온 세상에 알리는 언론도 ‘대한민국’이다. 또한 최소한 생산비라도 보장하라며 광장에 쌀가마니를 쌓아 불 지르는 농민과 치솟는 기름값에 최소한의 밥값이라도 보장하라며 연대파업을 벌이는 운수노동자들도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말이다.

이태원 참사 당일 저녁 6시34분 “사람들이 엉켜 잘못하다가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신고를 받은 경찰이 퇴로를 확보해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 보다는 ‘차로 확보’를 위해 인파를 인도 위로 올려보내는 일에 집중했다는 언론 보도(한겨레, 경찰이 지킨 건 ‘도로’였다…“인파 올려보내”)를 보면, 지금 ‘국가’ 시스템의 키를 쥐고 있는 위정자들이 무엇을 보호하고 지키려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천오백년 전 맹자가 이미 말했듯 권력이란 ‘민중의 바다 위에 뜬 조각배’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의 생명과 삶, 노동을 외면하는 권력의 미래는 성난 파도에 배가 뒤집히듯 가라앉을 운명만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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