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국립대는 경상남도의 거점 국립대학교다. 1910년 4월, 설립 인가를 받고 공립진주실업학교로 개교했던 진주농업학교(경남과학기술대학교)가 1948년 농과대학(경상대학교) 분리를 거친 후 각기 존속해 오다가 2020년에 통합되어 현재의 경상국립대학교가 되었다. 경상국립대학교의 개교 시기는 자연스럽게 진주실업학교의 출발 시점인 1910년으로 설정되었다(기존 경상대학교의 개교 시기는 1948년이었다). 학교 당국과 지역 여론도 1910년 개교에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경상국립대의 시작을 1910년으로 지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관보』, 1910년 4월 4일 진주실업학교 설립인가
『관보』, 1910년 4월 4일 진주실업학교 설립인가

두 학교의 모태인 진주실업학교는 1910년 4월 4일 설립 인가를 받고, 6월 15일 개교하였는데 약 4,500여원의 자금이 소요되었다. 설립 자금을 분석해 보면 지방비 2,000여원, 학부(學部)보조비 1,500여원, 창명학교(昌明學校)와 낙육재의 재산 1,000여원 전부가 승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낙육재의 재산 전부가 진주실업학교의 설립자금으로 승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낙육재는 어떤 곳이었는가? 낙육재는 1721년(경종 1년) 대구의 경상감영(慶尙監營) 소속으로 설립된 학교이자 도서관이었다. 설립 후 175년이 지난 1896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분리 설립되었다. 대구 낙육재는 밀양에 약 130석 규모의 둔토(屯土)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약 40석이 진주 낙육재의 설립 자금으로 소요되었다.

낙육재는 1906년 8월 27일 「칙령 제40호」 ‘고등학교령(高等學校令)’에 따라 낙육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 본과는 4년, 보습과는 1년이 수업 연한이었다. 그러나 낙육고등학교는 1909년 초 폐교되었다. 낙육고등학교가 폐교된 이유는 비밀결사단체 조직 등 활발한 항일투쟁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후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 다수가 진주와 인근 지역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대표적 인물이 진주의 강달영(姜達永)과 하동의 박치화(朴致和)이다.

 

낙육재 연혁
낙육재 연혁
진주실업학교 설립 예산
진주실업학교 설립 예산

낙육재는 폐교될 당시 고등학교였다. 그러나 현재의 고등학교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3.1운동 후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맡아 6.10 만세 사건을 기획하던 중 체포된 강달영이 1927년 10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한 진술을 참고해보면 학교의 수준이 짐작된다. 강달영은 자신이 낙육고등학교 출신이고 낙육고등학교의 수준은 보통학교와 중등학교의 중간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아래는 강달영의 심문 조서의 일부다.

1927년 10월 04일

京城地方法院公判調書 高允相外九十一名 公判調書(第九回) , 高允相 外 100名 (治安維持法違反等)

問 : 敎育ノ程度ハ如何。

姜達永 : 八年頃カラ十七、八年頃迄書堂テ漢文ヲ學ヒ二十一年ノ時 晋州ノ小學校ト中等學校トノ間位ノ程度ノ樂育高等學校ヲ卒業シマシタ。

민족학교였던 낙육고등학교(낙육재)는 일제에 철저히 부역했던 경상남도 관찰사 황철(黃鐵)의 주도로 폐교되었다.

폐교 이후 진주 지역 인사들이 이 학교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사범학교 설립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학교설립의 지속된 노력은 폐교 1년 뒤 진주실업학교의 설립으로 결실을 보았다. 진주실업학교는 낙육고등학교 터에 기존 교사를 증축하여 개교하였다. 초대교장은 진주종묘장 관리자인 사토 마사지로(佐藤政次郞)가 선임되었고, 학감에는 후나츠 시세이(船津至精)가 선임되었다.

 

진주실업학교 생도 모집 광고
진주실업학교 생도 모집 광고

생도 모집은 설립 신청 당시 예비과(豫備科) 30명, 원과(原科) 30명을 계획하였으나 최종적으로 경상남도 일대에서 100여 명의 생도가 지원하였고 최종 합격자는 27인 이었다. 합격자 가운데는 훗날 진주지역 3.1만세운동과 형평운동을 주도한 강상호(당시 강경호)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진주실업학교 제1회 합격자 명단과 출신지
진주실업학교 제1회 합격자 명단과 출신지

참고로 대구의 낙육재는 1906년 철폐되면서 도서가 많이 유실됐으나 일부가 대구향교(1907~19)와 대구부립도서관(1919~45)을 거쳐 현재 대구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돼 관리되고 있다. 현재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의 문헌실 명칭을 낙육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낙육재의 이름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수료)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수료)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