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 이후 곡물수출이 확대되면서 농촌 내에 새로운 금융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쌀의 주된 판매자인 지주층은 쌀 가격이 오르자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미곡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토지매입에 열중하는 한편, 소작인에게 전세를 부담시켜 지대수취량을 늘리고 곡물의 계절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판매수익을 극대화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을 토지에 재투자함으로써 지주들은 부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반면 대다수의 농민층은 수확기에 소작료, 조세, 부채 등을 갚고 나면 수확을 하여도 1년 동안 먹을 식량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다. 이마저도 면포 등 생활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남아 있는 곡물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부득이 농민들은 지주나 부농에게 개인적인 부채를 얻거나 5일장이 열리는 시장에서 대금업자를 통해 고리의 자금을 융통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악순환은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농민층의 의식도 변해가면서 농민전쟁 등 농민들의 집단반발을 불러왔다. 또 대한제국기에 이르러서는 활빈당과 같은 조직적인 농민항쟁이 이어짐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도 농민층의 요구를 일정하게 수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던 지주적 사회구조가 유지되는 선에서 고리대 금융구조를 개선하여 경작농민을 보호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이  지방금융조합’ 의 설립이었다.

그러나 지방금융조합’  설립은 대한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진행한 것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에 의해서였다. 그는 탁지부와 협의 하에 19064지방금융조합설립요강을 검토하였다. 그 내용은 2~3개 군에 1개의 조합을 설치하고 단기의 소액자금을 신용대부하며, 지배인은 특별히 일본인을 채용하고 자금은 정부의 공채자금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19075월 칙령에 따라 전국 주요 도시에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지방금융조합1907825광주지방금융조합을 시작으로 그해 전국 17개 주요 도시에서 설립되었다. 진주에서는 19071127일 진주지방금융조합’ 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관보에 따르면 진주지방금융조합’ 의 실제 운영은 이보다 앞선 190788일부터였다.  ‘진주지방금융조합’ 1918진양금융조합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조합의 규모는 1918년 현재 조합원 수 511, 출자금 7,860, 예금 19,550, 대부금 10,947원 규모였으나 1931년 현재 예금 213,308, 대부금 147,469원 규모로 성장하였다.

다음으로 설립된 것은 진주금융조합이다. ‘진주금융조합은 진주의 자본가로 성장한 일본인들의 주도로 설립되어, 1919210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설립 당시 200원의 예금으로 시작하였으나 일본인들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1931년 현재 예금 415,774, 대부금 376,660원으로 진주 최대의 금융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진주 도심지를 벗어난 반성과 문산에서도 1924년 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우선 동부 5개면을 관할하는반성금융조합1924229일 출자금 365원으로 설립되었고, 뒤이어 19241224일 문산금융조합이 출자금 110원으로 설립되었다.

 

1929년 4월 일반성면 창촌리에 신축된 반성금융조합
1929년 4월 일반성면 창촌리에 신축된 반성금융조합

마지막으로 설립된 것은 19281227일 설립된 진산금융조합이다. ‘진산금융조합진양금융조합에서 분리된 조합으로 도동면, 집현면, 대곡면, 미천면을 관할하였다. 설립 이듬해인 1929년 진주재판소 건너편에 사업비 6,200원을 들여 본관 63, 부속건물 46평의 사무소를 신축하였다. 뒤늦게 설립되었지만 1931년 현재 예금 179,115, 대부금 96,299원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한편, 1924730일 진주에서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도난사건이 진주금융조합에서 발생하였다. 사건의 주인공은 박춘성(朴春星)이었다. 박춘성은 진주금융조합직원으로 6,000원을 식산은행으로 예금하러 가던 중 그 자금을 가지고 만주 하얼빈에 거주하는 자신의 큰형에게 가려다 서울에서 붙잡힌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박춘성 단독 계획이 아닌 하얼빈에 거주하는 박춘성의 큰형과 진주의 김영호, 강경호, 장두한, 김성길 등이 공모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박춘성의 큰형은 1919년 진주 3.1만세운동 당시 체포를 피해 만주로 건너간 상태였다. 따라서 추후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 자금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더라면 만주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설립 초기 금융조합 설치 취지는 고리대 금융구조를 개선하여 경작농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즉 조합원에게 경제발달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조합은 정부가 임면권을 가지는 이사가 지배하는 관제조합이었고, 실제로 대부를 받은 자는 저당제공능력이 있는 중농 이상의 부자와 지주,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저리로 대부받은 돈을 소작으로 내줄 토지 구입이나 고리대 자금으로 이용했다. 결국 금융조합은 일제의 지주 중심적 농업정책 시행과 국가주의적 재편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진주에서는 1907년부터 일제강점 기간 동안 5개의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금융조합들은 해방 후 대부분 협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현재 농협은행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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