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 건너 밭에서 양파모종을 돌보고 있는데 저만치 들길 모퉁이를 돌아 아들이 손수레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카페 마당에서 뽑은 잡초를 버리러 가져오나보다 했다.

그게 뭐야?”

밭이랑 건너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밭가에 손수레를 놓고 무엇인가를 들어내는데 불그스름한 색이 언뜻 비쳤다.

단호박. 다 썩어버렸어요.”

단호박이라는 소리에 나는 헐레벌떡 손수레 쪽으로 달려나갔다. 늦은 여름 백 개가 넘는 단호박을 수확해 붉은 양파망에 넣어 저온창고에 보관한 것이었다. 양파망 한 자루에 열대여섯 개씩 넣어두었는데 대부분 허옇게 곰팡이가 피어 썩어있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저온 창고 온도가 안 맞았나 봐. 영상 일 점 오 도로 맞춰져 있더라고.”

좀 신경을 쓰지 그랬어.”

내가 뭘 아나. 그래도 이리 될 줄은 몰랐지.

양파망에 담겨 썩어있는 단호박을 밭가에 쏟는 아들도 시무룩했다. 어쩌다 하나씩 괜찮은 것이 나오면 골라내고, 덜 썩은 것은 잘라내면서 작업을 마무리하는 휘근이를 내려다보는데 아까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카페에서 쓸 재료를 손수 마련해주고 싶어

지난해부터 보름이는 카페에서 단호박치즈케잌을 만들어 팔았다. 그때는 단호박 농사를 하지 않아 비싼 값에 사서 썼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 올해 농사를 준비하면서 단호박을 많이 심기로 했다.

적어도 그런 것만은 내가 직접 농사지어 보태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산언저리 밭에 단호박 쉰 포기를 심었다. 쉬 가뭄을 타는 밭이라 뿌리가 실하게 내리기까지 하루 한 번씩 물조리개를 들어야 했다. 밭고랑 풀도 서너 번씩이나 뽑아주었다.

단호박은 잘 자라주었다. 유월부터 꽃이 피고 호박이 맺히더니 팔월 들어 단단해지고 꼬투리가 희끗희끗해졌다. 쓸 만한 단호박을 백 개 넘게 땄다.

봐라. 이거면 일 년 치로 충분하겠지?”

벌건 양파망에 한가득 든 단호박을 마당가에 부려놓고 의기양양해했다.

충분하고말고요.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청귤모히또를 내오며 보름이도 즐거워했다.

산골 마을카페라 보름이는 카페에 쓰이는 재료를 최대한 마을에서 나오는 것으로 준비해 썼다. 커피콩이나 청귤, 딸기처럼 부득이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내가 농사를 짓거나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보름이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나도 최대한 카페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려고 애썼다.

봄이 오면 밭두렁으로 오디를 따러 다녔고, 가을이면 야생오미자를 따기 위해 마을 뒷산을 올랐다. 유월에 접어들면 버려진 매실나무를 찾아다녔고, 서리가 내리면 산언저리에 있는 모과나무에서 샛노란 모과를 따 날랐다.

꼭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는 단호박치즈케잌에 쓸 단호박도 많이 심었고, 생강라떼 만들 생강도 많이 심었다. 단호박도 많이 땄고, 생강도 팔십 킬로나 캤다. 대추나무를 세 그루나 심어 대추차 만들 대추도 넉넉히 땄다.

여름이면 팥빙수를 만들어 내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가 한둘이 아니었다. 앵두, 수박, 곶감, 말린 대추에 떡 조각까지 푸짐하게 들어가는 팥빙수는 보름이 카페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올해는 팥 농사도 잘 되어 오십 킬로 넘게 수확해 두었다.

나는 꼭 그러고 싶었다.

야생오미자를 따러 뒷산을 싸다니면서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따지 못해 오히려 미안했다. ‘아버지가 저기 저 산에서 딴 오미자예요.’라며 손님들께 자랑하는 보름이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보름이 카페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이 산골에 살고 있는 시아비로써 함께 살아가는 며느리에게 해주어야 할 삶의 답례였다.

고마운 도시 처자 며느리

보름이는 우리 집에 민박을 와서 인연을 맺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혼자 여행한 멋진 도시 처자였다. 야무지고 맑고 밝아 보였던 그 도시 처자는 해마다 두서너 번씩 우리 집에 민박을 다녀갔고, 그때마다 우리와는 깊게 정을 쌓았다.

그 무렵 아들은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접고 이 산골로 내려왔다. 그 도시처자와 만나게 되었고, 급기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무르고 철없는 아들에겐 과분한 결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보름이가 너무 고마워. 우리 식구가 되어준 게.”

아내는 걸핏하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

서울에서 예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아내와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을 받아 안은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도시 처자가 이 산골로 시집이랍시고 내려왔을 때 우리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 산골에 무얼 바라 삶의 뿌리를 내리겠는가. 잠시 머물다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겨갈 거라 여겼다.

둘은 아내가 한과를 만들어 팔던 시기에 식품제조업 허가를 내고 지은 공장건물 단칸방에서 살았다. 우리 집과 조그만 대밭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공장이래야 겨우 열다섯 평 가정주택과 다름없었다. 살림살이 하나 제대로 놓기에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보름이는 이듬해 그 공장건물을 카페로 만들겠다고 했다. 좋을 대로 하라고 승낙은 했어도 이 산골 카페에 찾아 들 손님이 있을까 싶었다. 지리산 둘레길 옆이어서 뜸하니 여행자가 다니지만 해보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하고 싶다고 하니 해보라는 생각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었다.

‘'마을카페 안녕'이라는 간판을 걸고 보름이는 카페 일에 몰두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는 공치는 날도 많았다. 하루 종일 커피 한두 잔 팔고 문 닫는 날도 많았다. 나와 아내는 애를 태웠지만 그래도 보름이는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카페 문을 닫는 날이 없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 무슨 손님이 들겠냐며 하루 쉬라고 해도 혹시라도 찾아온 손님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문을 열어둔 보름이었다.

어머니. 오늘도 망했어요.”

공치는 날이면 이런 말로 헤헤거리며 웃어넘겼다. 겉모습은 저래도 얼마나 속상할까 싶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저런 메뉴를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고, 만드는 것마다 꽤 인기를 얻었다. 몇 년 전 텃밭채소샐러드국수를 선보였을 때 그 국수를 받아든 손님들의 표정을 보며 마침내 이 카페는 망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무렵 멋진 도시 처자는 장롱 속에 깊이 감춰두었던 날개옷을 태워 없애버렸다.

사람들은 복덩이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라며 우리 삶을 축복했다.

 

산골 노인네의 집으로 가는 길

그런 만큼 나도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해마다 조금씩 농사를 늘려온 것도 이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절망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길을 헤쳐 가는 멋진 도시 처자의 시아비는 더 강해져야 했다. 그게 가족들 앞에서 내가 보여주어야 할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올바르지 못했다. 공정하지도 않았다. 성실히 산다는 것은 기죽어 다문다문 산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억센 산골에서 살아가려면 성실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할 것이었다. 여리디여린 가족들은 그러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져야 할 처지였다.

책임을 나누어야 할 가족들이 있고, 가족이 즐거워할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것이 내 삶의 몫이니까. 그렇게 여기며 살아야 내 삶이 충만하다 느껴지니까. 이젠 그래야 할 만큼의 나이를 먹었으니까.

세상의 잘잘못에 박수를 보내거나 저항해온 그 젊은 시절은 이제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리 밖으로 흘러가 버렸고, 황혼의 내겐 앞서 걷는 아들의 헐거운 뒷등과 밤마다 끙끙대는 아내의 신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척박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목소리는 꺼칠꺼칠해졌고, 눈도 부리부리해졌다. 나는 그렇게 억척스런 산골 노인네가 되어버렸다.

너무 애태우지 마라. 내년에 또 심으면 되지.”

상한 단호박을 이리저리 도려내며 안타까워하는 아들 등 뒤에서 어른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이미 거칠게 변해버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 애썼다.

열심히 농사지은 단호박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미안해서였던지 쉬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아들이 몸을 일으켰다.

알록달록 등산옷을 입은 서너 명의 둘레길 여행자가 개울 건너 카페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들 손수레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 한 꺼풀 허물을 벗어던진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진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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