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의 주요 이동 수단은 도로, 철도 등의 육상교통과 하늘을 잇는 항공교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통이 발달하기 전 우리의 주요 교통수단은 한강, 낙동강, 대동강, 금강 같은 큰 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는 수로와 연안 포구를 중심으로 하는 해운교통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큰 도시의 배후에는 관문 역할을 하는 나루와 항구가 발달하였다. 서울의 관문인 인천을 비롯해 북경의 천진, 도쿄의 요코하마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경남도청의 소재지였던 진주는 육로교통의 오지였다. 따라서 개항 후 바닷길을 통한 관문역할의 항구가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번성했던 항구는 장암진(場岩津, 현재 사천 두원중공업 앞)이었다. 장암진은 1760년 경상우조창(慶尙右漕倉)이 인근의 가산항(駕山港)으로 옮겨지기까지 조창이 있었던 곳으로 구해창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구해창은 장소가 협소하고 낮은 수심으로 인해 개항 이후 기선 운항이 발달하면서 큰 배가 드나들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구해창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삼천포 문선항으로 이동해 갔다. 삼천포항은 구해창과 달리 수심이 깊고 큰 기선이 드나들기에 유리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조창 :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창고

장암창(구해창)지
장암창(구해창)지

기록에 따르면 삼천포에서 기선이 운항되기 시작한 시기는 1905년 12월경이다. 부산에 본사를 둔 ‘충영회조점(경영자 望月龍太郞)’에서 운영하던 기선 ‘신룡호(198톤)’가 부산을 출발해 마산, 통영, 삼천포 사이를 매월 7~8회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주와 삼천포는 도로 사정이 불편하여 많은 인적·물적 자원의 왕래가 불가하였다. 이에 진주 삼천포 사이의 도로 확장은 시급히 해결해야 될 문제로 대두되었다.

도로공사는 일본인 기술진과 경남관찰사 황철(黃鐵)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노역 동원과 주변 민가 훼손으로 지역민의 반발이 매우 높았다. 또한 지역의 조선인들은 도로공사가 완료되면 많은 일본인들의 이주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거주지를 침식당하는 조선인들의 우려로 나타났다. 무리한 노역의 원성과 조선인들의 우려는 끝내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의 충돌을 일으켰다.

1909년 2월, 공사도중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투쟁이 발생하였는데 조선인 측에서는 약 1천 명의 군중이 집결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헌병대가 출동하여 진정되었지만 공사로 인한 조선인들의 불만이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경남에서 최초로 ‘신작로’라 불리며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도로가 1909년 11월 말경 완성되어 1910년 2월, 폭 18척(5.5m) 넓이로 정식 개통되었다.

진주 삼천포간의 신작로는 개통되었지만 아직 자동차 운송이 발달하기 못했기 때문에 진주와 좀 더 거리가 가까운 사천만의 항구 개발이 필요하였는데, 다음으로 주목받은 곳이 선진항이었었다. 선진항은 진주 남쪽 12km지점에 있던 포구로 조선 초기까지 세곡을 운반하던 해창이 있던 곳이었다. 선진항은 1912년 봄 조선기선회사가 지점인 스가회조점을 설치하여 운항을 시작한 이래 연간 700~800척 이상의 화물선이 집중되었다.

주변에 파출소와 우체국이 들어설 만큼 선진항이 번성하자 1913년 일본 후쿠오카 자본가들이 설립한 경남궤도(주)가 진주와 선진 사이에 경편철도인 수압식철도(인력으로 움직이는 철도) 부설을 계획하여 허가를 받았지만, 이듬해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사가 연기되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선진항은 철도와 자동차가 발달하기 전까지 사실상 진주의 외항으로 번성하였다.

 

선진항
선진항

이 밖에도 선진항의 스가회조점은 1913년 사천만의 최북단 중선포(현 한국항공 부근)에 하양장을 설치하여 진주와의 물류운송 거리를 더욱 좁혔으나 낮은 수심으로 많은 양의 물자를 처리하지는 못했다.

이상의 항구들을 통해 개항 후 진주는 더욱 근대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각 항구에서 사천과 진주의 정촌, 주약, 천전리로 이어진 물자는 진주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남강이라는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1913년까지 진주에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없어 천전리에서 배를 통해 인원과 물자가 진주 중심부로 건너갔다.

 

진주와 선진 사이에 계획되었던 일본의 수압식궤도
진주와 선진 사이에 계획되었던 일본의 수압식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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