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전통사회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1876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큰 이견이 없다.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76년 처음으로 부산항이 개항되고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이 개항됐다. 이에 따라 조선의 급속한 근대화도 진행됐다. 주지하듯 개항장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우리가 아닌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부인들이었다.

그렇다면 진주는 언제부터, 어떤 세력에 의해 전통도시에서 근대적 상업도시로의 변화 과정을 거쳤을까? 크게 본다면 진주로 이주한 일본인들과 호주 선교사들이 이 같은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가운데서도 일본인의 진주 왕래와 이주·정착은 진주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개항 이후 진주에 일본인이 왕래하기 시작한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1885년 이전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주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상인들이다. 당시 진주는 매월 2일과 7일 시장이 열렸고, 음력 2월과 10월에는 약 2개월간 충청도, 전라도, 대구지역의 상인까지 모여드는 대시(大市 : 큰 장날)가 열렸다. 일본인들은 대시 기간을 이용해 일정기간 진주에 머무르며 영업한 다음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가져온 주요 거래품은 약제, 석유, 燐寸(인촌=성냥) 등이었고 반대로 쌀, 대두, 목면 등을 수입해 갔다.

정주의 목적으로 처음 진주에 들어온 일본인은 이바라키현(茨城縣) 혹은 나가노현(長野縣) 사족(士族=무사가문) 출신의 소전부원삼랑(小田部原三郞)’이다. 소전은 18991, 웅천군수를 지낸 김응옥과 진주에 병원을 설립했다. 개원 후 3개월 만에 전라도를 비롯해 인근에서 400여 명의 환자가 내원할 정도로 병원은 성황이었으나, 이후 기록에 따르면 병원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부산 거류지의 일본인을 비롯해 경성 등 타지 일본인 상인들이 진주를 왕래했지만 조선인들과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수였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수료)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경상대 사학과 박사수료)

당시 진주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정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원인은 다양하게 추측되지만 크게 3가지 정도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하동, 곤양, 단성 등 진주와 인근 지역은 동학이 일어난 1894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동학도들과 의병들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부산 일본병참사령부의 조사와 보고에 의하면 이 기간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18962, 노응규 의병진의 부산 공격이 주목된다.

다음으로 경부선 철도 연선에서 벗어난 교통의 오지라는 점이다. 일본인들의 왕래가 시작될 무렵 부산에서 진주로 들어오는 길은 구해창(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을 이용하는 해로와 남강을 이용하는 수로, 그리고 창원과 마산포를 경유하는 육로였다. 진주에 진출하는 상인들은 주로 해로와 수운을 이용하였는데 해로는 3, 수운은 십 여일이 소요되었다. 육로도 단독보행 정도가 가능한 소로였기 때문에 다량의 물품을 거래하는 상인들의 이용에는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진주지역은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이어졌으리라 추측된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계사년(1593) 진주성이 함락될 때 하루에 6만 명이 섬멸 당하였다고 하였다. 또 선조 268월 형조판서 이덕형의 치계에는 진주성내에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었으며 죽이고 죽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약 6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한 지역인 만큼 일본인에 대한 진주 사람들의 배척 정서는 어느 지역보다 강했다 할 것이다. 여기에 경남 제일의 양반고을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던 진주 사람들은 일본인을 오랑캐로 여기며 오랑캐와 이웃해 사는 것마저 수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진주에 점포를 개설하고 정주를 시작한 사람은 구마모토현(熊本縣) 사족(士族=무사가문) 출신 매약상 요시무라 신지(吉村信())’. 요시무라는 19018, 32세의 나이로 진주성 북문밖에 점포를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수익이 많지 않아, 조선인과 공동으로 고구마를 심고 그것으로 소주를 양조해 판매하는 등 진주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요시무라는 1902년 후반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 진주 월아산 청곡사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요시무라와 진주 사람들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진주성 북문 밖에는 요시무라의 상점 외에도 20여 개의 상설 상점이 개설되어 있었다.

요시무라에 이어 190210, 야마구치(山口縣)의 평민(平民) 출신으로 개량 농기구를 판매하는 히라키 신이치(平木信一, 30)’가 이주해왔다. 히라키는 한국농상공부와 농기구 판매에 관한 특약을 맺고 진주와 사천에서 농기구를 판매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나가사키(長崎縣)의 사족(士族=무사가문) 출신 의사였던 이다 마사지로(伊田政次郞, 45)’와 그의 통역관이었던 모리타 슈우이치(森田秀一, 31)’도 진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의사 일행은 19028월부터 유행했던 호열자(콜레라)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머무른 뒤 진주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진주에 일본인이 정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9018월 무렵이다. 이후 러일전쟁 승리와 한일병합으로 진주 이주 일본인은 급증하였고, 이들의 이주로 진주는 급속하게 근대도시로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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