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 봄날의 배경음악

창가로 쏟아지는 봄날의 햇살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날에는 햇볕에 속아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섰으나 짓궂은 찬바람의 조롱을 받기도 한다. 또 어떤 날에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며 단단히 챙겨 입어놓고선 섬유 속으로 차오르는 봄기운을 이겨내지도 못한다. 한결 가벼운 차림이지만 여전히 겨울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재밌게도 이런 당황스러운 날씨에 대처하는 우리의 옷차림을 닮은 음반이 하나 나왔다. 바로 제목마저도 봄기운 가득한 이한철의 음반, [봄날]의 이야기다.

봄 날씨에 온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꽤 두터운 외투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고 경쾌한 멜로디 주위를 듬직한 베이스가 둘러싸고 있다. 그의 계절 프로젝트 중 봄 편에 해당하는 이번 음반은 그동안 그가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만든 음악 중에서 봄기운이 느껴지는 트랙들을 골라본 것이라고 한다. 날씨에 속고 또 속아도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잠깐의 추위도 용서가 될 것만 같다. 바로 코앞에 진짜 봄이 와있는데, 짜증을 내서 무엇하리!

[사진 1]

봄노래라고 해서 마냥 가볍고 감성적이기만 한 음악이 아니다. 나풀나풀한 사운드를 예상하며 첫 곡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들었다면 아마 꽤 놀랐을 것이다. 인트로의 드럼 소리는 생동감 넘치는 시작을 알린다. 온 몸의 감각을 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만약 어떤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있다면, 길바닥 표면을 따라 기분 좋게 흔들리면서 이 트랙의 리듬이 우리의 몸 위로 포개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첫 트랙으로 발걸음에 힘을 잔뜩 싣고 나면 ‘넌 나의 넘버원’이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트랙이 이어져 나온다. “이런 젠장, 커플 음악!”이라고 8비트로 악 쓰지 마시기를. 사실 유치찬란함이 가장 잘 어울리는 때라 하면 봄을 이길 계절이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노래의 기운을 빌어 인상 쓰는 것 대신 좀 더 미소 짓고, 환해지고,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아, 좋아’의 향연이 끝나고 나면 킹스턴 루디스카의 부드러운 스카연주가 함께 곁들여진 ‘봄날의 합창’이 이어진다. 이 트랙에 다다르면 결국 눈을 감고 햇살 아래서 몸을 사뿐히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 따뜻한 스카리듬이 가진 행복한 기운이 흥건하다. 당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연스럽게 춤이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두근거리는 봄날의 춤판이 벌어지고 난 다음 등장하는 ‘연애할래요?’는 재즈의 달콤함이 가미된 곡이다.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이한철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해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눈앞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두고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은 한 번 보고, 또 한 번 보고, 또 한 번 보면서 절정에 이른다. 가사를 따라가는 피아노의 달콤한 소리가 참 예쁘다. 이렇게도 연애를 부추기는 음악이 연달아 이어진다. (혹시 ‘어떡하면 좋죠?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노래 가사처럼 연애에 대한 질문이 계속 떠오르시는 분들은 이한철의 음반을 들으며 단디뉴스에서 준비한 연애 코너를 함께 보시라는 말씀드리고 싶다!)

로맨틱한 트랙들이 지나고 나면 ‘오래된 사진관’이 나오는데, 이곳엔 먼지 쌓인 사진처럼 오래된 추억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애잔한 그리움과 함께 저녁을 먹고, 불 꺼진 방에서 새벽을 맞고, 다시 눈을 부비며 일어난다. 계속 되는 하루에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사도 마무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마지막 기타 선율이 흘러나온다. 차분히 내려앉았던 흐름은 첫 곡의 분위기를 닮은 ‘뿌리’로 이어진다. 이 곡은 매력적인 록 사운드를 자랑하지만 고운 화음이 켜켜이 쌓여있어 맑은 느낌도 함께 담고 있다. 끝이 날 것 같다가 돌연 손뼉소리와 밴조가 등장하면서 컨트리 느낌으로 마무리를 한다. 마음껏 뻗어나가는 뿌리의 이미지가 자유로이(free) 변모하는 전개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형상화된 것 같은 트랙이다. ‘뿌리’의 마지막 부분이 예고편이라도 되듯 앞서 나왔던 ‘넌 나의 넘버원(Country Ver.)’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콘트라베이스의 힘 있는 내딛음 위로 밴조와 만돌린이 올라타면서 싱그러운 봄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햇살이 내리는 낮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봄밤의 묘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밤의 공기가 점점 누그러져서 우리의 체온과 비슷해질수록, 우리는 곁의 빈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곁에 누군가 함께 있는 것처럼 공기가 따뜻한데 주위를 둘러봐도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 그리움은 더욱 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봄날]의 마지막 트랙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김소월의 쓸쓸한 시에 재즈라는 외투를 입혀놓았다.

이 곡을 처음 들었던 순간 부드럽고 은은할 달빛 같은 피아노 소리에 매료되었고, 마음껏 그리움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생각에 결국 옷을 챙겨 입고 밤 산책을 나갔다. 재즈풍의 연주 덕분에 저릿한 가사도 음악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날 주변에 있던 밤의 공기를 따스하게 만들어준 음악이었다.

이한철의 이번 음반은 봄날의 어느 시간대에도 어울릴 수 있는 음반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도약을 하는 우리의 두 발에 더욱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따스한 낮에는 사랑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게 만들어주는가 하면, 달밤에는 마음 속 깊숙이 스며드는 그리움을 녹여주기도 한다. 햇살 앞에 완전히 무장해제하기에 앞서 이한철의 음악과 함께 이른 봄을 좋은 기분으로 맞이해보았으면 좋겠다.

[사진 2]

사운드그래피의 첫 사진작업은 이한철의 음악과 함께 해보았다. 이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온도와 감정들을 최대한 담아보려 노력했다. 집에 있던 어항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정적인 장면 아래서 헤엄을 치고 있는 구피들의 몸짓이 생동감 있어 보였다. 사진 속에는 따스한 빛과 함께 짙은 어둠 또한 존재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그리움의 색깔을 표현하고 싶었다. 결과물을 보고 나니 빛이 번진 부분이 마지막 곡에 등장하는 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Pentax Programplus, Fujicolor C200)

<필자>

박채린 http://blog.naver.com/chaelinjane/22031359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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