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도쿄의 밤에 색채를 끼얹다

7이 두 번 겹친 행운 가득한 7월의 어느 날, 한국에 짙은 장마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친구와 함께 도쿄로 넘어갔다. 어쩜 날짜도 그리 잘 맞췄는지,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입국심사에서 일본에 왜 왔냐고 물어보면 ‘장마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자고 했다.

둘 다 일본에 온 건 처음이고, 나는 친구랑 둘이서 멀리 떠난 여행은 처음이라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푹- 쉬는 여행’을 지향했던 우리에게, 첫날 시부야에서 보낸 저녁은 아주 강렬했다. 둘째 날은 조용한 거리를 걸었고 셋째 날은 온천에서 피로를 녹여냈으니, 왁자지껄한 시부야의 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이질적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7월 22일 아침에 처음 들었던 Suchmos의 음악들은 시부야의 밤거리를 내 머릿속에서 끄집어 낸 후 무채색의 기운을 탈탈 털어 내게 다시 내밀었다. 처음 낯선 곳에 놓인 기분, 처음 제대로 촬영해보는 새로 들여온 카메라의 감각, 빗방울이 떨어지는 와중에 느끼는 후련한 자유, 그때 느꼈던 짜릿한 감정들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났다. 일본 여행 이후로 평소에 좋아하던 FreeTEMPO나 Ego-Wrappin’의 음악들을 여행의 기억에 함께 입혀 놓았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들어왔던 음악과 처음 가본 여행지의 감각은 어딘가 모르게 겉돌았다. 일본 여행의 기억에 들어맞는 ‘적절하고도 새로운 음악’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던 찰나, Suchmos는 그런 내 기억의 방에 아주 짧은 노크를 하고 불쑥 들어온 ‘신기한 녀석들’이었다.

애시드 재즈, 펑크, 소울, 힙합, 록 그리고 또? 맛있는 블랜딩 음악.

커피와 술이 블랜딩 정도에 따라 다른 풍미를 만들어내듯 음악 또한 마찬가지. 어떤 장르들이 얼마나 섞이는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들이 어떻게 쌓여왔는지에 따라 스펙트럼은 무수하게 펼쳐진다. 그 사이 어딘가에 훌러덩 내던져지는 기분은 여행의 감각과 사뭇 비슷한 것 같다. ‘장르가 복합되어 어느 하나라고 꼭 집어말하기 곤란한 음악’ 스타일은 요즘 국내에서도 혁오(Hyukoh) 밴드의 커다란 인기 덕분에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주의 깊게 듣다보면 그렇게 장르가 섞인 음악들에서도 음악가들 각자의 다른 온도와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퓨전 장르를 지향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은 언어가 주는 분위기도 각양각색이고, 음악적인 그러데이션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다르다.

 Suchmos는 보컬의 Yonce와 베이스의 HSU, 드럼의 OK, 기타의 TAIKING, 그리고 DJ KCEE, 이렇게 다섯 멤버가 중심이 되어 꾸려나가는 밴드다. 그들의 정규작 [The Bay]는 Suchmos가 선보이는 12개의 다채로운 트랙들로 채워져 있다.

첫 곡 ‘Y M M’은 ‘요코하마(yokohama), 항구(minato), 그리고 미래(mirai)’에서 각 단어의 첫 스펠링만을 따온 제목을 가졌다. 깊고 묵직하게 찰랑거리는 베이스라인과 가볍게 그려지는 보컬 Yonce의 목소리가 어우러진다. ‘Gaga’는 업템포 트랙로, 첫 곡보다 조금 더 달구어진 분위기를 선사한다. 시부야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살아난 건 ‘しぶや(Shibuya)’라는 단어가 똑똑히 박혀있는 ‘Miree’라는 트랙에서였다. 시부야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하필 전시회의 오프닝 파티가 열리고 있었던 bar & dining 레스토랑 'N'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들뜬 마음으로 ‘이게 뭐야!’를 외쳤던 그 순간의 희열감이 이 트랙과도 겹쳤다. 쫄깃한 리듬이 살아있는 ‘GIRL’은 Ryohu의 그루비한 랩이 더해졌다. 적재적소에서 음악을 맛깔나게 살려주는 DJ KCEE의 손맛도 좋다.

몸을 가볍게 흔들며 음악을 한참 듣고 있으면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흐르는 것 같은 트랙이 하나 등장한다. ‘Get Lady’는 보컬 Yonce의 농후한 보이스와 가사가 돋보이는 트랙이다. 중간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같은 베이스의 움직임이 꽤 간지럽다. 마지막까지 흐름을 놓지 않던 곡이 스르르 흘러가버리면 다음 트랙은 또 다른 분위기를 꺼내놓는다. ‘Burn’은 록의 요소가 짙은 트랙이다. 잘고 강렬하게 뿌려지는 일렉 기타 사운드가 이전의 트랙들과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완전한 록을 하기에 Yonce의 목소리는 다소 촉촉한 면이 있지만, 각 멤버들이 하나둘씩 풀어놓는 사운드를 듣고 있자면 (간주 부분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런 스타일 또한 Suchmos가 만드는 다양한 색깔들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된다.

특별한 가사 없이 흘러가는 ‘S.G.S’를 듣고 있으면 ‘Burn’이 1부의 마지막 곡처럼 느껴진다. 음반의 구역을 나누는 것 같은 2분 11초짜리 ‘통로 트랙’의 끝에는 일렉트릭 펑크와 팝의 요소가 섞여있는 ‘Armstrong’이 기다리고 있다. ‘Alright’에 이르면 다시 템포가 누그러지는데, 느낌 있게 펼쳐진 그루브의 한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일렉 기타의 강렬한 등장이 임팩트를 남긴다. 재밌게 구성된 트랙이란 생각이 들었다. ‘Fallin’‘에서는 오래전의 팝록 음악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리듬이 세련된 어반을 만나 한층 멋진 음악으로 변모한다. 시종일관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미끄러지는 베이스라인의 뼈대 위로 Yonce의 담담한 목소리가 흐른다. 점점 과열되는 일렉 기타를 멀리 둠으로써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는 것 같았다.

11번째 트랙부터는 강렬한 요소들이 증발하고 훨씬 가볍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Pacific’에서는 사랑스러운 일렉트릭 피아노 사운드를 시작으로 한가로운 해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석양에 반짝이는 바다를 곁에 두고 맥주병을 손에 쥔 채 춤을 추는 이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지막 트랙은 ‘Miree Bay Ver.’로, ‘Pacific’과 더불어 청량감이 더해진 아쿠아 블루톤의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원곡 자체도 밝고 그루비한데 Bay Ver.에서 좀 더 편안하게 발산되는 기분이 든다. 마지막 두 트랙이 톤이 통일된 채로 함께 가벼워지니 음반 전체의 균형이 맞춰진 느낌이다.

루이(Louis Armstrong)의 애칭 ‘satchmo(새치모)’에서 따온 밴드 “큰입들”

밴드의 이름은 ‘큰 입’을 뜻하는 루이 암스트롱의 애칭 ‘satchmo’에서 따온 것이라고. 모던재즈 뮤지션이자 ‘재즈의 발명가’라 칭송받는 루이 암스트롱을 본받아 Suchmos는 ‘개척정신’을 밴드 깊숙이 스며들게 만들고 싶었나보다. 여름에 태어나 여름에 생을 마감한 거장과 여름에 공식적인 첫발걸음을 떼는 이들의 존재가 맞물리는 계절. 무수한 여름밤들 중 하루 정도는 그들에게 온전히 맡겨 봐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Suchmos의 [The Bay]를 위한 사운드그래피로, (멤버들은 요코하마 출신이지만!) 시부야의 밤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찍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뒷골목에서 환히 빛나고 있던 노란색의 컬러가 경쾌하고 기분 좋은 Suchmos의 스타일과 잘 맞는 것 같다. 건물 여기 저기에 흩뿌려져있는 다양한 그래피티에는 어느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Suchmos 음악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담고 싶다. 이 모든 풍경을 뒤로 하고 노란 스커트를 입은 여인이 율동적으로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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