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로 살라는 말이, 개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낼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되길

가난했던 것 같다. 아니 가난했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첫 집은 단칸 월세방, 5명의 가족이 한데 엉켜 잠들고는 했다. 5살 때쯤 진주로 이사와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가졌다. 작은방 3개가 있는 소위 ‘달동네’에 있는 집. 주변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가난했지만 열심히들 일했다.

아버지는 공무원 박봉에, 홑벌이. 아이 셋을 키워야 했다. 팍팍한 살림에 아들, 딸 모두 대학에 진학하며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 어디로 가야 돈이 덜 들까. 성적 따라, 기호 따라 비싼 사립대를 가는 건 꿈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 어린 시절부터 이 말이 뼈 속 깊이 박혀 있었나보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림자처럼 주변을 늘 배회했다. 서울지 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친구는 그랬다. 지방대 출신에, 늦은 시작, 남에 비해 내세울 것 없는 ‘스펙’을 보면 ‘언감생심’이라고. 분수에 맞춰 살라고. 적잖은 노력에도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 가까운 지방대에 보낸 걸 곧잘 후회했다.

‘아빠찬스’, ‘엄마찬스’, 요즘 유행하는 말들이다. 부자, 고학력인 부모를 가진 것만으로 사람의 한계를 말하는 ‘분수’가 달라지는 세상에서 부모가 권력을 쥘 때 ‘분수’의 차이는 확연해진다. 입시는 물론이고, 취업경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권력은 정보를 끌어다주고, 인맥을 만들어준다. 없는 ‘자리’도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김순종 편집장
김순종 편집장

진주에서도 최근 ‘아빠찬스’ 의혹이 일고 있다. 퇴직한 전직 국장의 행정과장 재임 시절, 그의 자녀 둘이 진주성 공무직 공무원과 진주시 청원경찰로 채용됐다는 이유다. 진주성 공무직 공무원의 경우 서류전형에서 공동 9위이다가, 면접에서 압도적인 점수를 받아 종합점수 1위로 채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의 ‘분수’는 우리 같은 서민의 ‘분수’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이 서민의 자식, 또 서민인 부모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대를 이어온 ‘분수’라는 이름의 한계가 서로를 죄인이 되게 한다. 억울하면 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노력한 만큼 권한을 누려도 된다는 ‘저급한 문화’를 만든다.

분수에 따라 살아온 서민들은 익숙할 법도 한 의혹에 목소리를 높인다. 진상조사와 결과에 따른 적합한 처벌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서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면, 힘 있는 이들은 이 같은 요구를 무시하고 잠재우며 그들의 위치를 지키는 게 ‘분수’를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난 21일 진주시의회에 오른 채용비리 의혹 조사안은 부결됐다. 의회는 시민의 대변자라고 하고, 시민을 대변함이 의무라고 하는데 상식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회의 의무보다, 각 의원들이 그들의 ‘분수’를 지키려 함이 이유였을까. 그들의 ‘분수’란 물론, 서민보다 힘 있는 자의 그것과 가까웠을 게다.

태어나면서부터 불공정한 세상이라고들 한다. 분수에 맞게 살라고도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은 힘도 ‘빽’도 없기에 공정하게 경쟁하고, 그 결과를 수용한다. 힘 있는 자들은 다르다. 언제든지 공정함을 뭉갤 수 있다. 각자의 분수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사회가 요구하는, 지켜야 할 도덕 윤리는 같을 것인데 말이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윤리에 기초해 각자 소임을 다할 때 공정의 기초는 세워진다. 아울러 언제쯤이면 분수에 맞게 살라는 이 비장한 주문이 없어지는 날이 올지, 그 날을 고대한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워지는 날. 분수대로 살라는 말이, 우리 사회가 개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기회를 보장한다는 의미가 될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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