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어느 ‘미친 인간’을 보며

귀감(龜鑑)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차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정도를 따져 봐도 그렇다는 얘기이다. 귀감도 필요하고 타산지석도 필요하다는 결론을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그리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귀감에서도 타산지석에서도 똑같이 배운다. 그러면서 세상은 조금씩 성숙하는 게 아닐까.

잠시 중학교 때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저렇게 해야지”가 귀감이요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는 타산지석이라고. “저렇게 해야지”가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고 귀감과 타산지석 모두 필요한 건 맞지만 가급적 타산지석보다는 귀감이 되라고 선생님은 가르치셨다. 초롱초롱한 눈에 귀를 쫑긋하던,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던 우리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절대음(音)이던 시절이었기는 했지만 그 가르침을 무조건 가슴에 새기고 지금도 추억의 형태로 그 가르침을 잊어먹지 않고 있다. 실천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래서 귀감이 되기보다는 타산지석으로 살았던 일들이 많았지만. 타산지석의 원래 뜻은 사실 그런 게 아니지만 어쨌든.

▲ 박흥준 상임고문

귀감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과연 귀감은 있는가. 분명 있을 터이지만 우리는 게을러서 귀감을 찾을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있고, 몇몇 언론의 귀감 찾기는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끝 모를 자괴심과 함께 우리는 세상에 대한 ‘시니컬’만 키워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토착왜구’가 준동하고, “생존을 위해 자존을 버리자”(조중동)는 주장이 약간의 대세를 이루고, 심지어는 “친일과 친미가 절대 필요하다”(김문수)는 기상천외한 언설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이완용이 환생하고 ‘구한말 쇄국’(황교안)이라는 황당한 언급도 역사적 맥락이 거세된 채 용감하게 등장했다. 아 참. 아니나 다를까. 신친일(나경원)이라는 이상한 억지도 엊그제 이에 뒤질세라 이어졌다.

타산지석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타산지석은 이렇듯 흘러넘치고 있다. 그들이 그럴 듯하게 주장하면 그게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고, 나머지 우리들은 그냥 따라야 하고, 그래야만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시작도 하지 않은 소득주도성장을 그들은 버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시작도 못 하게 훼방을 놓은 건 정작 그들이다. 정권을 내놓으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경제가 폭망했다는 그들의 비명은 그렇다 치고, 그 비명을 좇아 자나깨나 ‘촛불’을 비방하는 얘기가 천지에 진동한다.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치고 정작 밥 굶는 사람을 나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 보지 못 하고 있고 아직은 들은 바도 없다. 경제가 폭망했는데도 말이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한 10여년 전 우리는 안 되는 일이면 무조건 누구 탓을 했다. 당시는 비극이었고 지금은 희극이다.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비난하면서 누가 봐도 억지인 이웃 나라의 주장과 망동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무리하게 찾고 있다.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게 국제사회라지만 이건 아니다. 힘의 논리에 따른 평화는 기만이며 굴종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만만했지만 지금은 불안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무엇을 영원히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그들을 이처럼 아우성치게 하고 있다. 친일 해야만 살 수 있는 그들. 친미 해야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그들. 남북의 군사적 대결이 계속돼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그들.

이번에는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 보자. ‘포르투갈의 포도주’와 ‘영국의 직물’ 얘기이다. 18세기의 경제학자 리카아도는 포르투갈이 포도주도 생산하고 직물도 생산하는 것보다 기회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포도주를 생산해 영국에 수출하고 영국은 이와 반대로 포도주 대신 직물을 수출하는 게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설파했다. 이른 바 비교우위론이다. 이 이론은 지금 세계 무역시장 곳곳에서 관철되고 있으며 이 이론에 따라 지구촌 전체에서 치밀하게 분업이 이뤄지고 있다. 물론 국력에 따라 이익의 차이가 발생하고 선진국과 후진국이 고착화되는 부작용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세계경제의 스승은 현재로서는 단연코 리카아도이다.

지금은 21세기. 비교우위론에 따라 경제가 재편된 지 오래인 지금 우리 이웃의 어느 나라가 고등학교 교과서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망동을 저질렀다. 이는 국제적 약속을 깨는 일이며 이에 따른 악영향과 고통은 우리를 뛰어넘어 그들에게도 이를 것이고 나아가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게 움직일 수 없는 팩트이다. 모든 원인행위는 우리 이웃의 어느 나라에게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결자해지를 해야 사필귀정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온갖 트집과 생떼, 적반하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야말로 타산지석이다.

우리는 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저렇게 졸렬해서야 원” 해야 하고, 훗날 우리는 지금을 회상하며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졸렬해서야 원” 하며 우리를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지금도 경제강소국이지만 국제적 분업과 한 발 앞선 기술개발로 앞으로 우리는 적어도 제3세계 국가보다는 현저히 앞서 나갈 것이고 경제적 성취를 이어갈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 나라에 많은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 때를 맞으면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를 무조건 되새겨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이웃의 어느 나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빚을 우리에게 지고 있다. 우리를 희생시켜 대륙침략의 발판을 만들었고 전범국가의 단죄를 받기도 전에 우리의 또 한 번의 희생(한국전쟁)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강을 이루었다. 그 후에도 비싸게 팔고 싸게 조금만 사는 방법으로, 다시 말해 계속되는 우리의 희생을 수단으로 경제를 굴려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나오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가르치는 타산지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귀감이 되자. 중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처럼 타산지석보다는 귀감이다.

우리가 귀감이 되어야 할 대상은 한둘이 아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 국가와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그들이다. 부품이든 소재든 완제품이든 생산하고 사고팔고 함께 살아야 할 그들인데 앞으로 어느 순간 단지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급을 중단하는 치졸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자. 그러면 욕 먹는다. 우리 이웃의 어느 나라처럼.

공자는 仁(인), 맹자는 義(의). 이 나이 되도록 천학비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는 유교를 이 수준에서, 그야말로 고등학생 수준에서 나이브하게 이해하는 데 그치고 있다. 공맹의 가르침, 인의는 세계 경제지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돌아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인의에 기반하지 않으면 누구처럼 경제동물이라는 비아냥을 받게 되고 이번처럼 억지를 쓰면 세계여론이 돌아앉는다. 경제의 근간은 물론 이윤동기이겠으나 이윤을 추구하는 데 인의가 빠지면 오래 가지 못 한다. 그리고 모두가 불행해진다. 한 번 더 침략하려고 눈이 벌게서 ‘트럼프 따라 하기’에 뒤늦게 나선 이웃나라 어느 ‘미친 인간’에게 오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태는 오래지 않아 해결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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