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은 박정희 경제실패로 일어난 것”

-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독재 펼쳐 국부랄 수 없다”
- “4.19 혁명은 제2의 해방”

“박정희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경제정책 실패로 부마항쟁이 일어난 점을 보면 그는 ‘경제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국부’라고 부르지만 그의 일대기를 돌아보면 그렇게 부르기는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25일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형평운동 96주년을 기념해 연 ‘선거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본 한국현대사’라는 주제 강연에서 이 같이 말했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그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3가지 개념은 친일파, 선거, 민주화 운동이었다며, “이승만이 해방 후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며 그들이 득세하게 했고, 친일파의 득세는 분단체제 고착화, 가열화에 이바지하며 민주주의를 망쳤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경제발전 등에 이바지한 것은 3.1운동과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들 그리고 몇 번의 중요한 선거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4.19혁명은 ‘제2의 해방’이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4.19혁명 이후 박정희 군부의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 여러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었다는 이유다. 그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이승만 정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법치주의가 확립됐고, 김구의 죽음과 제주 4.3사건을 재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노조운동 등이 일어났다고 했다.

특히 그는 박정희를 ‘경제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부마항쟁이 일어난 것은  당시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한 것도 요인이 됐지만, 경제문제에 실패한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고 했다.

이어 “유신 시대 물가가 두 자리 수로 올랐고, 심할 때는 20~30% 올랐다. 부가가치세가 도입됐고 유가도 폭등했다. 중화학에 중복 투자해 경제 숨통이 막혔고, 전국적 투기붐이 일어나 78년 부동산 가격이 평균 48% 오르는 등 서민들이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유신말기 경제가 미끄러졌고, 이 같은 이유로 1980년 우리나라는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거두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한 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는데 이때는 그랬다”며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사람이 경제문제로 곤욕을 치른 셈”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부 학자들이 10.26사건 때 김재규가 총을 쏘지 않아 박정희가 조금 더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 신드롬(경제대통령)’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25일 강연에 참석한 진주시민들

그는 이승만을 국부로 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대게 다른 나라들은 국부라는 호칭을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에게 붙이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에서는 이승만보다는 김구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 당하는 등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다.

또한 그는 “이승만은 해방 후 사람들의 염원이던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고 되려 그들을 득세하게 했으며, 6.25 전쟁에 대한 책임도 있다. 무엇보다 3.15마산 의거, 4.19혁명 과정에서 160여명이 죽었다”며 이승만을 국부라 칭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서중석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재학 중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른 바 있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우리나라 ‘현대사 1호 박사’로 1991년부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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