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생명처럼 아이에게도 '빈틈'이 필요하다

내가 일하는 공장 앞에는 너른 논이 펼쳐져 있다. 시끄럽고 삭막한 쇠 일을 하면서도 언제든지 문 밖 마당에만 나서면 탁 트인 벌판을 만날 수 있다. 지난 겨우내 비닐 하우스 농사를 하지 않는 빈 논을 지켜보는 것이 나에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가을걷이 때 사람들이 미처 거두지 못한 곡식알갱이를 먹기 위해 검은 독수리 떼가 까맣게 논을 덮었다. 어떤 날엔 비둘기 떼가 몰려와 주린 배를 채우고 가고, 또 어떤 날엔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다.

 

논은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다.

음력 오월로 접어드는 요맘때가 한 해 가운데 농부들이 가장 바쁜 시절이다. 마른 논에 벙벙하게 물을 대어 흙을 잘게 부수는 로타리질을 한다. 논은 어느새 널따란 호수가 되어 온갖 생명들이 자라는 조물주의 용광로가 된다. 트렉터 뒤에 딸린 로타리 기계가 무섭게 쓸고 지나간 뒤에도 회전 칼날 사이로 용케 살아남은 개구리들은 어찌 저리 많은지. 저녁이 되면 까맣게 내려앉는 어둠처럼 개골거리는 그들의 울음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채운다.

농부가 거둬들일 나락만 키워내는 논은 세상에 없다. 계절에 따라 무수한 생명들을 길러내는 논을 보면 노자가 말한 수레바퀴 구멍이 생각난다.

“서른 개의 수렛살이 가운데 한 곳에 모이는데, 그곳이 비어 있어 쓰임을 만든다.”

그릇의 빈 곳과 비어 있는 방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無)이 쓰임(用)이 된다고 한다. ‘쓰임’이란 단순히 ‘사용됨’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삶’ 또는 ‘생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생명은 서로의 빈틈에서 싹트고 자란다. 풀과 나무들이 야박하게 자기의 대를 이을 씨앗 하나만 달랑 열매 맺는다면 이 세상에 동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꽃은 벌들이 새끼에게 먹일 꿀을 만들고, 벌이 모아둔 꿀통은 곰이 먹고서 겨울을 날 영양분을 얻는다.

세상 모든 동물과 식물들은 타자가 어렵게 내어준 ‘덤’을 먹고 산다.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것 어느 하나라도 자연이 어렵사리 내어 준 ‘덤’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할 줄 안다’고 말하는 인간들은 ‘덤’을 내지 않으려 한다. 목적한 것 외의 것은 ‘비효율’이라 규정하고, 덤을 줄일수록 ‘경제성’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농약을 쳐서 풀과 곤충들을 죽이고, 비료를 뿌려 목적한 식물과 열매를 웃자라게 만든다. 살충과 살균, 멸균과 소독제를 온 세상에다 뿌린다. 온갖 농약과 영양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유전자를 조작해 세상에 없던 괴물들을 쏟아낸다. 헤엄치지 못하는 연어와 걷지 못하는 돼지와 농약을 몸에 지닌 옥수수, 잉태 능력이 없는 각종 곡식과 열매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생명이라 할 수 없다. ‘덤’을 만들어 내지 않는 과학기술로 잉태한 영양덩어리일 뿐이다.

아이 키울 때도 ‘빈틈’은 필요하다. 잡초가 살지 못하는 비닐하우스에서 거둔 농산물을 먹고 살아 그런지 사람들은 자녀도 비닐하우스 작물 키우듯 한다. 새벽잠 줄여 학교에 보내 놓고 방과 후엔 학원과 학습지로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그 와중에 체력이 떨어질까 몸에 좋다는 온갖 영양제를 사다 먹이고 새벽엔 운동까지 시키는 부모도 보았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은 이제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삶에 숨구멍이 막힌 아이들은 짬이 나는 대로 전자 기기에 빠져든다. 가장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가장 많은 것을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과 디지털이 환경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짧은 순간에 음악을 들으며 빠르게 웹툰 화면을 넘기고,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카톡 잡담을 즐긴다. 노는 것도 빈틈 하나 없이 꽉 짜여져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모든 시골에는 ‘타작 마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동네 한 귀퉁이에 넓게 마련된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가을에 거둬들인 깨나 콩을 털었다. 말 그대로 타작을 하는 마당인 것이다.

일이 끝난 ‘타작마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을 청마루에 휙 던지고는 타작마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언제나 나뭇가지로 그린 땅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징어 땅콩과 땅따먹기, 단방구와 같은 놀이를 해질녘까지 하고나서 엄마가 ‘밥 먹으러 들어오라’며 고래고래 소리 칠 때서야 겨우 하나 둘 흩어졌다.

아이들은 ‘생명’이다. ‘타작마당’과 같은 뛰어 놀 공간이 필요하고, 해질녘까지 마음대로 놀고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모든 생명이 마땅히 누려야 되는 ‘빈틈’이다. ‘빈틈’이 있어야 생명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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