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악이 인생의 한 순간에 뜨겁게 맺혀올 때

언제나 음악을 주변에 흘려놓고 지내고 있지만, 어떤 음악들은 조금 더 운명적이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 곡들은 어쩌면 특별할 바 없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저 좋아하는 음악 정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음악들이 일상생활 중에 느낀 특별한 깨달음의 순간과 결합될 때는 내 귓가를 울리는 정도를 넘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볼륨으로 삶 전체를 꽉 메우는 기분이 든다.

음악과 에피파니(Epiphany, 그리스어로 ‘귀한 것의 출현’을 뜻하며 문학적으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통찰을 얻는 순간’을 뜻한다)의 만남, 나는 그것을 ‘인생 음악’이라 부른다.

첫 번째 인생 음악의 출현

처음으로 내 인생에 영향력을 펼쳐놓은 음악을 만난 건 스물한 살 때였던 2011년의 6월 5일(그해 일기장을 찾아보니 그 날의 주요사항을 적는 난에다가 ‘발견!!’이라고 써놓았다).

대학교 후문에 있는 W 카페 2층에서 친구와 과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곡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아채기라도 했던 걸까.

집중해서 잘하고 있다가 흘러나오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 뒤늦게야 인식하고 말았다. 스피커를 향해 절실하게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보았지만 이미 음악은 끝나가는 상태. 화면에는 주변 소음이 가득해 인식을 못 하겠다는 표시밖에 없었다.

“야, 아까 뭐라 그랬더라, 빠데야? 빠데야 dancing in ... September? 라고 한 것 같은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색창에 ‘빠데야 빠데야 하는 음악 뭐예요?’라고 치면서 친구랑 키득키득 웃었는데, 이럴 수가. 그걸 벌써 질문한 사람도 있었고 친절히 답변까지 해놓은 사람도 있었다. “오... Earth, wind and fire.... September...이거였구나!”

카페에서 처음 만났던 건 Toki Asako의 재즈 버전이었다. 그 느낌을 가지고 원곡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에 깜짝 놀랐지만, 나는 곧 이 노래가 가진 마성의 리듬과 멜로디에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플레이리스트가 자주 한 곡 재생 모드에 머물러 있었고, 아침이며 점심이며 해 질 녘이며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면서, 공부나 과제를 하면서도 늘 이 음악과 오래도록 함께했다.

이 노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적인 기운은 그날 이후의 내 삶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좀 더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 있게 해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다니던 학과는 거의 무조건 복수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성적에 무진장 신경을 써야 했다. (시험에서 겨우 해방되는가 싶었는데, 수능만큼이나 스트레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복수 전공 시험에 합격했어도 두 가지 공부를 병행하면서 모든 부담감과 불안감이 두 배 그 이상으로 늘어났었고 계속 이어지던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치던 때였다.

이 노래가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져서 정말이지 마음 놓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줄지 않는 샘물이라 이 음악에 담겨서 마음껏 위안을 받았다.

그 이후로 공부는 하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소소한 밴드 활동도 계속했었고 내가 꿈꿔왔던 일상 예술의 삶을 어떻게 펼쳐낼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기회로 좋은 분들과 친분을 쌓고 교류하게 되면서 내 삶은 한층 다채로운 색을 띠게 되었다.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에서 귓가를 울리던 기분 좋은 베이스 라인과 들릴 듯 말 듯 찰랑거리던 기타연주, 시원스레 뻗어 가던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와 멤버들의 목소리, 이 음악의 모든 요소가 나비효과를 만들어내며 인생에 긍정적이고 즐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 인생 음악

인생에 울려 퍼진 두 번째 음악을 만난 건 2015년 5월 24일의 밤이었다.

사실 최근에 무거운 생각들을 물고 늘어진다고 깊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혹자는 고민은 짧게 끝내는 것이라 말했지만 나는 마음속에 번지는 의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야만 했다.

어디까지가 나의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인지, 지금의 삶에서 가장 불편하다고 느끼는 요소가 무엇인지, 개인적인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무한에 가까운 자유가 지금 당장 주어진다고 해도 실제로 내가 행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밤낮이 뒤바뀌면서까지 처절하게 숙고해보았다.

그 대답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이 10일이었다. 인생 고민 대장정을 마친 기념으로 운동을 진하게 하고 샤워를 하고 나니 새벽 2시가 되어있었다. 머리를 말리면서 차분하게 마지막 생각들을 정리해냈을 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Gavin Turek의 ‘Don’t Fight It’이었다.

따뜻한 분홍빛의 배경 앞에서 멋진 포즈와 함께 Gavin Turek이 활짝 웃고 있다. 그녀의 표정에 나의 후련한 감정이 함께 겹쳤다.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그림을 위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현실에서 그걸 짜 맞추려 하지는 마. 뭘 그렇게 싸우려고 들어! 상상 속의 자유에 종속되어서는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 다 흘려보내지 말고, 그냥 다 내려놔요. 그 어떤 비교도 끊어버리고 나에게만 허락된 삶을 좀 더 즐겁게 쌓아가는 게 어때?’ 깊은 새벽, 노란 드레스의 여인은 내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Don’t fight it, don’t fight it, don’t fight it,‘ 노래에 흐르는 가사를 기분 좋게 따라 불렀다. 세상에 참 싸워야 할 것들이 많지만, 나의 과분한 욕심과는 더는 싸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모든 걸 망치면서까지 싸워낼 힘보다는 현재 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즐겁게 이어가는 나의 태도와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더욱 원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나의 인생 음악은 모두 디스코였다. 평소에 디스코 음악들을 즐겨 듣는 것도 아닌데, 웬일인지 디스코 음악에서 자꾸 큰 감정이 맺힌다.

두 곡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온도, 색채가 내가 추구하는 인생의 느낌과 쨍하고 맞아 떨어졌는가 보다. Gavin Turek의 노래에 ‘September’를 불러 봐도 어색하지가 않은 것에서 뭔가 힌트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나의 고마운 인생 음악들을 위한 사운드그래피.

인생을 울리는 음악들이 강력한 햇살이 되어 내 인생의 한 지점에서 모인다. 그 순간을 통과한 음악들이 나의 나머지 삶을 환하게 비추며 퍼져나가는 모습이다.

인생을 살면서, 단순한 호감을 초월해 특별히 맺히는 많은 것들을 꾸준히 모아 가다 보면 그것들을 모두 관통하는 ‘가장 중심의 무엇’을 발견해낼 수도 있겠다. 내 인생을 그것 하나로 표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끊임없이 생각의 잔가지들을 쳐내고 중심에 다가가고 싶다. 그러다가 만나게 될 세 번째 인생 음악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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