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기적을 다시 만나며

실은 나도 눈을 반쯤 감은 채였다. 이제 막 자정이 지났다. 극심하게 몰려드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신문을 넘겼다. 옆에선 아들이 시험공부 중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말고사를 겨우 며칠 앞두고 벼락치기에 돌입한지 이틀째. 아까부터 아들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평소 안하던 공부를 억지로 하자니 머리에 쥐가 나는 모양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죄 없는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방바닥을 뒹굴었다.

전날, 코앞으로 닥친 기말고사에 쫓겨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 내가 문제집 푼 거 좀 매겨주세요.” 그러니까 그날 밤 나의 역할은 문제집 정답을 매기는 채점요원. (아들의 공부를 감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음을, 굳이 덧붙인다.)

▲ 재인 초보엄마

아들이 시험 범위 내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나는 신문을 보기로 했다. ‘카카오 카풀 서비스에 반발하는 택시 기사 분신 사망사건’이 헤드라인에 걸려있었다. 제목만 봐도 불에 데인 듯이 가슴이 뜨거워져서 신문을 얼굴로 가져오는데, 아들이 불쑥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저렇게 눈앞의 이익만 쫓아가니까 일이 터지는 거라고요. 대기업이 왜 카풀까지 하는 건데.” 놀라웠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이걸 보다니. “국어시간에 딸깍발이 할 때 나왔거든요. 사람들이 멀리 내다보고 일을 해야 되는데 당장의 이익만 쫓아가니까 문제라고." 나는 당장 니 눈앞에 있는 문제집에나 집중하라고, 쥐어박는 소릴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그러게, 욕심들이 많아서.” 그런데 너는 문제집 두 바닥 푸는데 대체 몇 시간이 걸리는 거냐.

뒤통수를 향해 엄마가 레이저를 쏘아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멀쩡한 볼펜을 해체하고 있었다. 뚜껑과 몸통, 볼펜심을 차례로 분해하더니 스프링을 잡고 쭈욱 늘어뜨렸다. “이야, 이게 이만큼 늘어나네, 엄마! 이것 봐요! 엄청 길죠?” 나는 아들이 보여준 볼펜 스프링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로 응수했다. “12시 넘었다.” 녀석이 공부와 상관없는 볼펜 스프링을 잡고 늘어진데 대한 보복성(?) 발언. 저걸 또 원래대로 끼워 맞추는데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을라고.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들이 방문을 열더니, “엄마, 나 배 아파서 화장실!”

신문 마지막 페이지의 세 번째 사설까지 다 읽어갈 무렵, 아들이 돌아왔다. “출출한데 뭐 먹을 거 없어요? 아, 배고파!” 나는 냉장고를 깨워 달걀 프라이와 핫도그를 꺼냈다. 따끈하게 익혀서 아들이 좋아하는 겨자 소스도 물결 모양으로 뿌려주었다. “시험공부의 꽃은 야식이지. 역시 우리 엄마야!” 녀석이 입가에 노란 겨자 소스를 묻혀가며 넉살좋게 엄지 척을 해보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잠이라도 푹 자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신문을 덮었다. “피곤하지? 어깨 주물러줄까?” “오, 개꿀~!”

평소 살이라곤 없이 삐쩍 말라서 늘 걱정스러웠던 아들인데, 어깨가 제법 단단해져있었다. “많이 컸네, 우리 아들. 너 어릴 때 진짜 작았는데. 밤에 노래했던 거 생각나?” 녀석의 뼈가 아직 몰랑몰랑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니가 아기였을 때, 밤에 불 끄고 자기 전에 아빠랑 내가 <모래요정 바람돌이> 노래를 자주 불러줬거든. 근데 25개월째였나? 갑자기 니가 그 노래를 혼자 부르는 거야.”

“우와, 진짜? 대박! 25개월이면 엄청 빠른 거 아니에요?”

“당연하지. 아기 혼자서 긴 노래를 다 불렀다니까. 엄청 대단한 거지.”

“기억나요! 이거잖아. <일어나요, 바람돌이, 모래의 요정~>”

“맞아, 맞아, 그 노래!”

아들과 나는 <바람돌이>를 같이 부르다가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깔깔대며 웃었다.

아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 천사를 처음 안아본 우리 부부는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꼬물거리며 세상에 나온 아이가 엎드리고 기고 앉고 서고 걷는 모든 장면들이 감동이었고 모든 하루가 기적이었다. 그랬던 니가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그 사이 나는 ‘너’라는 감동과 기적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구나. 욕심에 겨워서.

지난 기억으로 내가 잠시 아득해져 있을 때, 아들은 자기가 25개월 만에 동요 한곡을 다 불렀다는데 심취해 두 볼이 상기되었다. 나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얼마나 똑똑했다고, 진짜 대단한 아기였어. 그러니까 지금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어!”

아들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엄마! 시간 없어요. 빨리 공부해야지. 나 과학 문제집 끝까지 풀고 잘 거야. 피곤하면 먼저 주무세요.”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고 나와서 나는 컴퓨터를 켰다. 덕분에 이 원고가 마무리 되어간다.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벼락치기로 밀린 원고를 쓰는 엄마라니. 공범으로 묶여도 할 말이 없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