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아부지. 저녁은 뭐 먹을까?” 운전석에 앉은 아들 녀석이 백미러로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진주환경연합 후원음악회가 있다고 해서 녀석이 나가는 사무실 활동가들과 함께 진주로 나가는 길이었다. “상봉동에 있는 진가네 돼지국밥이 좋더라. 소면도 무한리필 되고.” “또 돼지국밥?” “그 집 돼지국밥 맛있더라. 왜 싫어?”

“아부지. 아부지도 그러면 꼰대 다 된 거예요. 항상 돼지국밥. 그게 꼰대라는 증거라고요. 돼지국밥 아니면 밥맛이 안 나지? 다른 음식은 쳐다보기도 싫지? 다른 음식점 가볼 생각도 못하지? 삼시세끼 맨날 먹는 밥그릇 한번 못 바꾸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보수꼴통이고, 아부지가 그렇게 변해가는 거라고. 그냥 오늘은 쌀국수 먹어요. 쌀국수.” 녀석은 따발총처럼 씹어댔다. 환갑진갑 다 넘긴 나이로 또 녀석으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 김석봉 농부

미운 눈길로 녀석의 등짝을 한동안 바라보다 눈길을 돌렸다. 차창 밖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 위로 황혼의 햇살이 빠르게 빨려들고 있었다. 녀석의 말이 불쾌해 곰곰 곱씹어보는데 어느 순간 그래,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골에 들어와 살면서 이웃 노인네들의 폐쇄성에 깜짝 놀랐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사나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읍내 장날 시장에 가면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싸전을 지나 물레방아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들고, 뚱보네 생선전에서 동태 두어 마리 자르고, 난전에 퍼지르고 앉은 씨앗장사에게 다가가 씨앗 사고, 동해물약국에서 감기약이나 파스 사고, 우진철물점에 들러 호미 사고, 시민농약사에서 고추 탄저병약 사고, 시장통 간판도 상호도 없는 음식점에 들어 수제비를 먹는 코스였다.

왜 항상 이 집에서 얼어빠진 생선만 사느냐며 싱싱한 선어를 파는 고성수산으로 끌고 가도 손을 뿌리치기 일쑤였고, 씨앗은 흥농종묘 가게에서 사야 된다며 설명을 덧붙여도 끝끝내는 난전 씨앗장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웃들을 처음으로 병곡식당에 끌고 들어갔을 때의 그 모습은 가관이었다. 육칠십 년을 살면서 이 식당 순대국밥이나 내장국밥은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 내가 먼저 부추겉절이와 새우젓과 고추다데기를 차례로 넣어 국밥을 말자 이내 내가 하는 대로 따라 국밥을 마는 것이었다.

오륙년 전 장날이었다. 장을 다 보고 장터 들머리에서 만난 이웃들을 데불고 중국집으로 갔었다. 자장면을 시키려는 이웃들께 막무가내로 잡채밥을 시켜드렸다. 나보다도 세 살 위인 이웃 아주머니는 잡채밥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오로지 그 상호도 간판도 없는 음식점 수제비나 칼국수가 장날 장터에서 해결한 한 끼 식사의 전부였다.

“뭐 먹을까? 아지매, 조양식당 돼지국밥 어때요.” 지난 여름 장날이었다. 장을 다 봐놓고 점심을 먹고 가자는 말에 내가 조양식당을 권했었다. “어찌 아자씨는 돼지국밥밖에 모르요. 저 앞 분식집에 보리밥 비빔밥도 좋더마. 이것저것 나물도 많이 얹어 주고......” 대뜸 이웃 아주머니가 보리비빔밥을 먹고 싶어 했다.

“에이. 그 집 보리비빔밥이야 집에서도 언제든지 해 먹을 수 있는 거고. 그냥 고깃국 먹어요. 고깃국.” 나는 이웃들을 끌다시피 하며 어느새 단골이 되어버린 조양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돼지국밥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어느새 이웃들처럼 정해진 코스가 생겼고, 나도 어느새 그 코스대로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킹스할인마트에서 공산품 사고, 물레방아정육점에서 고기 끊고, 전주상회에서 필요한 야채 사고, 고성수산에서 해산물 사고, 흥농종묘상회에서 씨앗 사고, 동해물약국에서 파스 사고, 우진철물에서 괭이자루 사고, 조양식당에서 돼지국밥과 소주 한 병 먹는 코스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하루 일과도 짜여진 시각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다섯 시에 컴퓨터를 켜고, 일곱 시에 컴퓨터 끄고 밖으로 나가 밭 둘러보고, 거위와 닭 모이와 물 주고, 사흘에 한번 커다란 다라에 거위 목욕물 채워주고, 마당 쓸고, 거실과 방 청소기 돌리고, 아침밥 먹고, 밭일 있으면 밭으로 가고, 밭일이 없으면 화목 하러 숲으로 간다.

한나절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점심 먹고, 낮잠 자고, 이웃 사랑방에 가서 가보패를 떼거나 민화투를 치다 다섯 시면 돌아오고, 민박손님 있는 날은 아궁이에 군불 넣고, 마당에 고양이들 사료 뿌려주고, 저녁밥 먹고, 화목보일러 나무 넣고, 들어와 드러누워 텔레비전 보다 잠들고......

생각이라고 특히 변화를 모색하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내년엔 무슨 농사를 하나. 저쪽 밭엔 무슨 작물을 심나. 창고 바닥 시멘트작업은 언제 하나. 마루에 묵은 때도 벗겨내야 하는데. 내일은 화분을 실내로 들일까. 뭐 이런 정도의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삼바도 혜경궁도 쌀값도 세상 밖의 일이었다. 안타깝고 서러운 죽음들도,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싸움들도 나의 일상에 끼어들지 못했다. 시야를 가리는 미세먼지도, 통일의 길을 만드는 화살머리고지의 굉음도, 대놓고 이 나라를 쥐고 주무르려는 미국의 패악질도 내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변화의 여지가 없는 하루하루를 산다. 날이 밝으면 아픈 무릎 질질 끌며 밭으로 나가는 이웃 노인네를 보면서 ‘나는 저처럼 살지는 않으리라’했던 다짐도 허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좋은 마을을 만들고, 가난한 이웃들의 한 맺힌 삶에 조그만 윤기라도 더하고자 했던 꿈도 꺾여 허물어지는 것 같다.

여행은 고사하고 영화관 다녀온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보헤미안랩소디라는 영화가 볼만하다는데 보러 갈 계획도 못 세운다. 그냥 정해진 시각표대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집을 떠난다는 것이 피곤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낯설어진다.

일정한 시각표를 거부하지 못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마을과 집을 떠나지 못하고, 고작 읍내 장터거리가 내 발걸음의 종착지였다. 이렇듯 스스로 움츠려드는 이 산골에서의 하루하루는 나를 꼰대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 같다. 자꾸만 고집불통 보수꼴통 노인네의 세상 속으로 한 걸음 한걸음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리 살아도 행복한 것인가. 맛난 반찬에 고봉밥을 먹고, 손녀의 재롱에 웃음꽃을 피운다. 핍박받고 떠밀린 이웃의 눈물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 이리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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