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봉의 산촌일기] 주렁주렁 자라난 수박을 보며..

"나는 안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김석봉 농부l승인2018.07.09l수정2018.07.0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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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 많이 달렸다. 축구공 만하게 큰 놈도 더러 있다. 참외도 주렁주렁 달려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수박과 참외를 밭에 심어 따먹는 일은 농사일 중에서도 가장 폼 나는 일이었다. 우리가 먹기 위해 몇 포기밖에 심지 않지만 수박은 가장 공을 들여 가꾸는 작물이었다.

밭을 빌려 농사를 처음 시작한 그해 수박모종을 심어놓고 아침 일 절반을 수박에 쏟았었다. 이웃으로부터 수박 가꾸기 강의를 들었고, 그에 따라 매일매일 한 뼘 넘게 자라는 곁순을 따주어야 했다. 수박 열 포기 심어 열 덩이의 수박을 따먹었던 그해, 수박을 쩌억 갈라 벌건 속살을 만났을 때의 희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수박을 크게 키웠다는 칭찬과 자연의 맛과 향이 난다며 감동하는 가족 앞에서 성취감의 절정을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먹을 만큼 수박을 심었고, 해마다 수박농사는 성공했고, 쉽게 만나기 힘든 무농약 무비료 노지수박을 마음껏 따 먹을 수 있게 하였다. 하우스수박에 비해 당도는 덜했어도 가족들은 내가 따 온 수박 앞에서 한없는 만족감을 보여주었다.

▲ 김석봉 농부

나는 일찍이 가족들로부터 칭찬 받을 일은 못하고 살았었다. 나이 쉰 살에 이르러 여기 산골로 들어올 때 가진 재산이래야 전세보증금 이천오백만 원과 예금 일천여 만원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억척스레 살아온 아내가 모은 것이었으니 가장으로써 빵점짜리 삶을 산 셈이었다.

환경운동 한답시고, ‘환경운동은 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 내 삶의 흉허물을 스스로 덮었었다. 궁핍하게 사는 가족들을 알게 모르게 윽박지르며 살아온 삶이었다. 아내와 아들 녀석은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무능한 가장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고, 그런 줄도 모른 채 나는 돈키호테처럼 우쭐거리며 세상을 넘나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저소득층으로 전락한 내 삶은 고등학생이 된 아들 녀석에게 수업료를 면제받는 자존심 상할 일을 안겨주었다. 아내는 음식점을 전전하는 찬모가 되어있었다. 열 평 남짓한 단독주택 2층에 세 들어 살면서 벽지 한 번 새것으로 바꿔보지 못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삶이었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야 당당할 줄 알았다. 그래야 뭐든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디까지일까. 내 삶의 절정은 어디까지인가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할 거리가 너무 멀고 험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줄도 학벌도 배경도 없이 정의감만으로 시작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컴컴한 공간이 필요했다. 솜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내 삶의 영역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했으나 언제나 모자랐다. 이런저런 것에 반대했고, 이런저런 일로 다투었다. 내가 바란 세상을 세월은 비켜흘렀고, 그렇게 흐른 세월 속에서 내 열정적인 행위의 결과는 언제나 절망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많이 거칠어졌고, 상해있었다. 내가 서있던 자리는 언제나 백지 위였고, 끄트머리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문득 더 이상 내 삶에 진전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면서부터 나는 아들 녀석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세상을 살았으므로 녀석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법관이 되기를 바랐고, 언론인이 되기를 바랐다. 교육자가 되기를 바랐고,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성취하지 못한 삶의 영역을 저라도 차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녀석의 어깨 위에 걸쳐두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전혀 계층이동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백일장에 나가기만하면 상장을 받아오던 녀석은 삼류시인도 되지 못했고, 백과사전에 파묻혀 살던 녀석은 허튼 논객도 되지 못했다. 산골의 작은 환경단체를 직장으로 잡았으니 밥벌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주 가끔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 크게 곤궁하지 않은 살림살이면 족하다는 이도 여럿 만났고, 좋은 벗님 몇몇만 남겨도 성공한 삶이라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개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이었고, 더 높이 오르려는 사람들이었다. ‘딱 거기까지만’으로 만족하는 이는 결코 본 적이 없었고, 모든 이가 ‘조금만 더’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너도 이제 시를 써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도 해보지 그러냐.” 언젠가 문득 아들 녀석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등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녀석은 그저 흘끔 쳐다볼 뿐 별 말이 없었다. 산골에 살면서 시인이란 칭호를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였고, 그래야 이 산골로 시집 온 며느리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오면 녀석이 응모하기를 은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이 무엇인가 이루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욕심일 뿐이었다.

“그렇게만 살지 말고 자그맣게 요리교실이라도 열어보든가 하지.” 언젠가 문득 아내에게 한 말이었다. 아내는 아예 얼굴조차 돌리지 않았다. 민박집 주인으로 반찬이나 만들고 있는 아내가 못마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의 음식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잘 알기에 권한 말이었다. 배운 것을 베풀고 스스로 성취감을 느껴보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 또한 고생만 시켜온 아내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서 내뱉은 지아비의 욕심일 뿐이었다. 나는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으므로 아들 녀석과 아내가 ‘조금만 더’ 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쟁이 노인네의 모습만 남았다.

뒷마당에서 수탁이 홰를 치며 운다. 들창이 밝아온다. 문득 달력을 쳐다보았다. 손꼽음을 해본다. 오월 말에 수박꼬투리 꽃이 떨어졌으니 이제 따 먹을 때가 되었다. 수박에 얼굴을 파묻고, 볼에 수박씨를 붙인 손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난다. “정말 수박맛이 제대로 나요. 역시 아버님이 최고.”라며 엄지척을 보이고, 환하게 웃을 며느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어깨가 우쭐거린다.

나는 안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내 삶에 찾아온 아름다운 사람들과 모여 앉아 수박을 쪼개고, 수박의 벌건 속살을 마주했을 때가 내 삶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수박의 맛과 향에 감격하는 동안 내 삶의 꼬투리에도 새로운 꽃송이가 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안다. 모든 것을 남겨두고 문득 이 산골로 스며들려 했을 때의 헐벗은 듯한 느낌이 이제부터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걸어가는 내 삶의 발걸음이 더 이상 낯선 미로를 좇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왔던 곳으로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김석봉 농부  ksb@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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