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탓하기 전에 정치권을 먼저 돌아보라

이제 딱 하루 남았다. 지난 두 주간 거리를 빨노초파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동네 골목마다 엎드려 지지를 ‘호소’하던 후보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오늘 저녁 일몰과 함께 잦아들 것이다.

후보를 포함한 선거운동원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선거운동 기간 시민들도 참 고생이 많았다. 눈과 귀를 때리는 현란한 춤과 음악들, 시야를 가리는 현수막의 고딕체 문구들에 우리는 충분히 시달렸다.

정당과 후보자들이 내건 구호와 공약들로도 모자라 한쪽에서는 유권자의 발걸음을 투표장으로 이끌기 위한 호소와 협박성 문구들이 내걸렸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했다는 이 말은 최근 선거시기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2천5백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신통한 예지력을 발휘해 오늘날 보통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독려를 위해 이 말을 남겼을 리 없지만,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를 당해 본 한국의 유권자들에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 서성룡 편집장

세대별 투표율 지수도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논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럽의 국가들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현할 수 있는 배경은 혜택의 당사자인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예컨대, “프랑스 대학 등록금 싼 거 부럽지? 프랑스 대학생 투표율은 약 83% 이상이다. 정치인이 대학생 눈치가 안보일 수가 없지. 반면 대한민국은 36% 쯤 된다. 너희같으면 대학생 눈치 보겠니?” 배우 최민이 2014년 트위터에 올린 이 말은 수없이 많은 리트윗을 기록하며 오늘날까지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과연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선거 날 집에서 쉬거나 놀러 다니기 바쁜 사람들일까? 우리사회가 젊은이들이 공부와 취업 외에 사회와 정치에 눈을 돌릴 수 있도록 여유를 허용하는 사회인지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게 아닐까?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젊은이들이 노인층에 비해 투표율이 낮은 원인을 모두 당사자 탓으로만 돌리기엔 뭔가 부족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지 않았다. 4.19나 6.10항쟁 그리고 불과 얼마 전 탄핵으로 불의한 정권을 끌어내린 촛불집회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가 보기에 국민들은 할 만큼 했다. 지금은 오히려 정치가 국민들의 목소리에 답해야 할 차례다. 하지만 정치권은 참정권을 만18세로 낮추자는 국민들의 요구조차 외면한다. 정당 지지도와 의석 비율의 심각한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목소리도 결국 외면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의석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시민단체와 학계의 오랜 요구는 기득권을 쥔 정치권 앞에선 ‘소귀에 경 읽기’였다. 승자가 독식하는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은 결국 거대 양당의 탐욕 때문에 좌절됐다. 백만 촛불시위의 결과로 들어서 스스로 ‘촛불정부’라 일컫는 이 정부가 약자를 위해 상징적으로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안도 ‘산입범위 확대’라는 꼼수로 그 의미가 반감됐다.

정치권이 투표하지 않는 국민들을 타박하기 전에 먼저 투표를 외면하는 국민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정치가 국민들을 배신하고 매번 절망을 안기는데도, 열심히 투표소를 찾는 유권자들이 오히려 대견하다.

선거는 최선과 차선을 고르는 제도가 아니라 최악과 차악을 가리는 수단일 뿐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과 선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게다.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투표가 최소한 ‘차선’은 고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거만으로 부족하다.

선거는 ‘정치’라는 운동장에 투입할 대표선수를 고르는 일이다. 실질적인 정치는 오히려 선거가 끝난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정치인은 고마움을 모르는 족속이다. 지지율이 낮으면 땅바닥에 코가 닿도록 엎드려 절 하다가도, 지지율이 높아지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금세 호령하려 든다. 그래서 정치인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는 늘 위험하다. 될 수 있는 한 여러 사람 여러 정당에 지지율을 흩어 놓는 것이 국민에게 유리하다.

선거기간 동안 정치인들이 납작 엎드려 절한다고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선거 이후 일상 속에서 정치인이 유권자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민주주의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어쩌랴. 일단은 투표율이 높아야 정치인들이 국민 눈치라도 보는 ‘척’을 하니 말이다. ‘차선’과 ‘차악’를 잘 살펴보면 그래도 좀 더 나은 정당과 정치인이 보일 것이다. 일단은 투표소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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