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이 있으니 결코 외롭지만은 않은 삶'

아랫집 뒤 구석진 곳에서 꽃분이가 드러누운 채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겼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아들놈이 차를 가져오고, 황급히 읍내 동물병원을 향했다. 꽃분이는 열흘 쯤 전에 지난해처럼 또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동물병원에 도착하자 원장이 때마침 자리에 있었다. 꽃분이의 증상이 처음 나타났을 때 동물병원에 전화를 했는데 마을 방역 나가서 오후 2시는 되어야 돌아온다고 했었다. 그래서 증상이 심해보이는 데도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었다. 꽃분이는 심한 헛구역질을 했고, 우리는 날계란을 먹였고, 이후 물을 많이 마셨고, 새끼들이 옹알대는 집 앞에 쓰러지듯 드러누웠고, 우리는 안절부절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꽃분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꽃분이가 사라졌다. 집 안엔 새끼들만 다섯 마리가 올망졸망 모여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집 앞쪽으로 나는 뒤쪽 골목으로 찾아 나섰다. 아무리 불러도 기척이 없었다. 퍼뜩 언젠가 들었던 ‘동물은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웃 빈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없었다. 앞 골목 모퉁이를 돌 때 컥컥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거기 꽃분이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로 누워있었다.

차를 타면서 동물병원에 ‘응급이니 지금 당장 연락해서 원장을 오라고 전해 달라.’는 전화를 했다. 꽃분이를 안고 가는 내내 ‘제발 살아라, 새끼를 두고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막막했던 것은 큰 병이면 어쩌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이 많이 들면 어쩌나하는 현실적인 걱정이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참으로 미안했다.

▲ 김석봉 농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 키우느라 필수영양소를 소진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특히 칼슘이 부족하면 이런 증상을 나타냅니다.” 원장은 아주 가볍게 진단을 내렸다. 수액주사를 꽂고, 이런저런 영양물질을 투입하자 꽃분이는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를 향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었다. 아, 꽃분아.

꽃분이가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벌써 일주일쯤 전이었다. 이유 없이 집을 들락날락하였고, 바깥에 걸어둔 가마솥 아궁이로 기어들어가 재를 긁어내기도 하면서 온몸에 검댕이 묻어 검정개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날씨가 더워서 그렇겠거니 했다. 고기를 조금 더 삶아주었고, 집 앞에 우산을 펼쳐 그늘막을 쳐주었을 뿐이었다. 꽃분이는 자신의 몸에서 필수영양물질이 고갈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처럼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그렇게 될 때까지 젖을 물린 꽃분이였다. 수액주사바늘이 달린 다리가 아프련만 꽃분이는 입원실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을지 모를 새끼들을 찾아야 한다는 간절함에 꽃분이는 비좁은 입원실에서 바쁜 발돋움질을 하고 있었다.

“칼슘보충을 해주어야 합니다. 마른멸치나 북어국 같은 것을 자주 먹이면 좋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산모용 사료 한 봉지 사들고 동물병원을 나섰다. 기운을 차린 꽃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미안했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도 모르면서 가족이라 여기면서 함께 살았으니 참으로 한심한 반려자였다.

내가 일곱 살 때 팔목을 개에 물려 큰 상처를 입었었다. 어머니는 미친개에 물렸다는 판단에 진주까지 나가 광견병 주사액을 사오셨다. 그리고는 매일 오릿길 밖 면소재지에 있는 보건소에 주사를 맞히려 다니셨다. 늦가을 제법 따가운 햇볕 속에서 나를 업고 흙먼지 날리던 신작로를 따라 걷던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나는 개를 무서워하였다. 개만 보면 오금이 저렸다. 담장 안에서 개가 짖어도 그 집 대문 앞을 지나가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개와 함께 살게 된 때는 1993년경이었다. 아는 처자가 시집을 가면서 애완견 한 마리를 우리 집에 맡겼는데 임신한 암컷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 강아지를 데려가려 와서는 어미개만 데려가고 새끼 두 마리를 우리에게 주었다.

말티즈라는 종이었다. 당시엔 애완견이 흔치 않았고, 분양받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제법 비싸고 귀한 애완견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 중 암컷 한 마리만 키웠다. ‘버들이’라는 이름으로 열일곱 해를 우리와 함께 살다 죽었다. 버들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면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버들이는 함께 살아오면서 내게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인식시켜준 고마운 반려견이었다.

이 산골에 살면서 함께 하는 가족들이 많이 생겼다. 지금 열일곱 나이가 된 바둑이, 나이도 모를 떠돌이 행운이와 그의 새끼 고미가 있다. 그리고 아랫집엔 몸집이 커다란 이랑이와 두렁이, 몸집이 강아지만한 고양이이 무아, 쩜이, 뚝이가 집을 차지하고 있다. 뒷마당엔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아갈 닭 10마리, 거위 덤벙이와 새데기가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마당엔 서른 마리의 길고양이가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있다.

가끔은 민박손님으로 왔다가 수많은 동물들 때문에 뒷머리 긁적이며 집을 옮기는 손님들도 있지만 또한 가끔은 민박을 오면서 동물들 간식을 챙겨오는 손님들도 있으니 결코 천덕꾸러기는 아니다.

마당의 황녀 예삐는 우리집 길고양이들 중에서도 가장 늙었음에도 보일러실 앞 사과박스에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노랭이와 까칠이가 엊그제부터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또 어딘가에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내일은 읍내 마트에서 싸구려 꽁치통조림이라도 서너 개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꽃분이는 그동안 새끼들에게 다하지 못한 정을 쏟느라 집에서 나오질 않는다. 삶아준 마른멸치는 국물까지 다 먹었고, 산모용 사료도 빈그릇만 남았다. 사경을 헤매다 온 어미의 몸뚱이는 아랑곳없이 다섯 마리의 새끼들은 투실투실한 몸을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젖을 빤다.

쪼그려 앉아 집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문득 어린아이를 해코지한 텔레비전 뉴스가 떠오른다. 아이를 굶긴 어버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아이를 폭행한 어버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아이를 버린 어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몹쓸 세상, 몹쓸 사람들을 조롱하듯 꽃분이는 그동안 어미로써 다하지 못한 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먹이고 핥아주느라 혼신을 다한다.

여기 산골에 들어와 살면서 많은 세상 사람들과는 헤어졌고 잊혀졌지만 다시 새롭게 만나고 정든 저들이 있으니 결코 외롭지만은 않은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당신이 마당을 가진 집에서 산다면 담 너머 다른 세상 속의 생명들도 살펴보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