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성록은 4.3사건, 진주보도연맹 사건의 학살 주범"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12년 만에 4.3항쟁 추념행사에 참석해 희생자들에게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4.3항쟁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먼저 이루어져야겠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평가와 단죄가 반드시 필요하다.

4.3항쟁 당시 제주 사람들이 ‘탁 대위’라는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던 인물, 당시 제9연대 정보과장이었던 탁성록 대위는 ‘진주 사람’이다.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민 학살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1950년 6.25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향 진주에 돌아와 ‘보도연맹 학살’을 저지른 인물이다.

그럼에도 현재 진주시 ‘논개사이버박물관’에 그가 작곡/작사한 ‘논개의 노래’가 실려 있어 진주시 당국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 4.3사건, 진주 보도연맹 사건의 학살 주범인 탁성록

탁성록,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범

탁성록은 1948년 6월 조선경비대총사령부 특명 제122호에 의거 제5여단 제9연대 정보과장으로 제주에 들어갔다. 그는 그해 12월 말 제주를 떠날 때까지 약 6개월 간 즉결총살은 물론 생사람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집단학살극을 주도했다.

탁성록과 관련해 제주에서 나오는 여러 증언들은 그의 악독한 행동을 짐작토록 한다. 그는 무소불위의 사형권을 가진 저승사자였으며, 아편중독자였다. 탁성록에 대한 대부분의 증언은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이다.

‘제주읍내 주민들의 희생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송요찬 9연대장 외에 9연대장 정보참모 탁성록 대위...(중략)... 등이 손꼽힌다. 이들은 제주도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382쪽 -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383쪽 -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

-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383쪽 -

1949년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탁성록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밤중에 그에게 호명돼 나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수용소 천막 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야 했다. 그가 누군가를 지목해 발길질을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해당자를 끌고 가 처형했다. 아침 점호를 위해 천막 앞에 나서면 매일 천막 앞 무덤 부근에는 시신이 나뒹굴었다.

탁성록은 여성을 농락하다 살해하는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유지들이 갇히기 시작할 무렵 읍내 여성들도 헌병대에 끌려 들어갔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들 중 다수는 읍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여성들이었는데 탁성록은 그들 대부분을 즉결 처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다가 홀로된 상태이던 강상유를 강제로 범한 후 함께 살다 죽였다. 강상유의 오빠 강상호는 일제 강점기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는데, 이와 관련됐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이 같은 악행 때문일까. 2013년 개봉한 영화 <지슬>에는 탁성록 대위를 모델로 한 마약쟁이 김 상사가 나온다. 영화에서 김 상사는 시종일관 칼을 갈며 주민들을 난도질하고, 마을 여성 ‘순덕이’를 사로잡아 칼로 위협하고 겁탈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재소자들이 집결해 있다.

탁성록, 1950년 진주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

탁성록은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진주로 돌아와 소령 계급장을 달고 특무대장을 지내며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학살극'을 벌였다.

1950년 7월15일쯤부터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진주경찰서 유치장과 진주형무소 등에 감금됐다. 이들은 진주가 인민군에게 곧 함락될 것이 예견되던 7월21일부터 7월26일까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 등지에서 학살됐다.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까지 포함하면 학살된 사람은 최소 2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천인공노할 대학살극은 당시 진주특무대장이던 탁성록 소령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 당시 진주헌병대 일등상사였던 강문식은 1999년 “통영 등 다른 지역에서는 헌병대가 학살을 저지른 경우가 있었지만 진주의 경우 헌병대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학살이 진주파견대 특무대의 소행이었다는 걸 우리(헌병대)는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탁성록의 만행은 이외에도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 진주 논개사이버박물관 홈페이지에 탁성록의 노래가 버젓이 올라와 있다.

(사진 = 진주 논개사이버박물관 갈무리)

음악가 탁성록?, 그가 작곡/작사한 ‘논개의 노래’

진주시 ‘논개사이버박물관’에 버젓이 실려 있어.

4.3항쟁 당시,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학살한 탁성록은 놀랍게도 군인이 되기 전에 대중음악가로 활동했다. 음악가로서 탁성록에 대한 첫 기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진주 동명극장(일제 때 삼포관)에서 진주영사기술자동맹이 개최한 남선남녀콩쿨대회에 심사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속의 대중가요 작곡가였으며, ‘탁성록 경음악단’을 이끌기도 했다.

문제는 탁성록의 그간 행적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주시 ‘논개사이버박물관’에 그가 작곡/작사한 ‘논개의 노래’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진주시 당국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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