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접어들던 청송교도소 농장의 어느 무더운 오후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날씨는 무더웠다. 재소자들은 땀을 쏟으며 무를 뽑고 있었다. 무는 크고 나무토막 같았다. 봄무를 심었는데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울 때까지 키웠으니 심이 단단히 박혔고, 웬만한 사람의 허벅지만한 것도 있었다.

출역①을 하면서 취사장 앞을 지나올 때면 취사부들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무를 좀 보내라. 칼이 안 들어간다.’며 경운출역부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이 무는 감호소와 교도소 재소자들의 부식용이었다.

교도소가 하는 농삿일이지만 작업과에서 농사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용도과에 파는 형식이었다. 용도과는 이 농산물을 작업과로부터 사서 재소자들의 부식으로 반입했다. 그러니 당연히 무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 김석봉 전 녹색당 운영위원장

작업과는 많은 무게를 생산해야 했고, 용도과는 무의 질은 따질 필요도 없이 일정 금액을 작업과로 넘겨주면 될 일이었다. 거래의 이면에 나타날 부정은 눈감고도 뻔히 보일 정도였다.

나는 흘끔흘끔 시계를 보면서 농장 언저리에 나 있는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면 소재지에서 교도소 외정문 앞 직원아파트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국수를 삶아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날은 작업반장②의 생일이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미남형 얼굴에 유순한 눈매를 가진 40대 중반의 작업반장은 우량수③였다. 부드러운 서울 말씨를 써서 내가 다 부러워할 정도였다.

“올 때 되었다. 준비해.”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경비교도대원 1명과 작업반장과 따까리④가 천천히 도로를 향해 밭두렁을 걸어 나갔다. 무를 뽑던 재소자들은 일손을 놓고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정확한 시간에 도로에 나타났다. 나는 밭두렁에 올라 이리저리 손을 흔들었고, 속도를 줄인 버스는 예상했던 곳을 조금 지나쳐 정차하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자 거기에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아내가 홀로 덩그마니 서 있었다. 머리엔 제법 커다란 다라를 이고, 한 손엔 커다란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가끔 본 모습이었는데도 그날은 유달리 더 아름답게 보여 마치 한 송이 깨달맞이꽃이 한들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다가간 작업반장과 따까리가 그 짐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사이 아내는 빈 그릇을 챙겨가려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국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를 살아도 면회 오는 사람 하나 없이 힘들어하는 재소자들을 볼 때면 측은한 마음에 괜히 울컥해져서 “그래, 내일은 국수라도 한 그릇 먹자.”라고 약속을 하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애꿎게도 아내에게 고생을 시키곤 했었다.

국수를 대충 준비해도 되련만 언제나 아내는 정성을 다했다. 달걀지단은 물론이고, 고명이란 고명은 다 준비했다. 주전자에 육수를 담고, 다라에 삶은 국수와 준비한 고명을 챙겨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버스를 타야 하는 일이었으니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을 거였다.

그 전 겨울엔 높은 사람이 감호소 시찰을 나온다 하여 직원아파트 입구부터 외정문까지 꽃밭 정리작업을 하러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동짓날이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고 바람은 드세게 몰아쳤다. 나는 직원아파트 입구 공중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끓인 팥죽이 퍼뜩 생각나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이를 들쳐 업고 그 추위 속에 팥죽을 가져왔고, 직원아파트 뒤쪽 그늘에 숨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알심팥죽을 먹었는데 재소자들은 한동안 ‘한국에서 동짓날 사식으로 팥죽을 먹은 최초의 재소자’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농장에 출역하려면 모범수여야 가능했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은 대개 이마에 다섯 개 이상의 별은 달고 있었다.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하였으니 돌봐주는 가족이 없거나 연고자 없는 재소자가 부지기수였다.

면회 올 사람도 없고 영치금⑤ 넣어줄 이도 없는 재소자들의 감빵생활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래서 모범수가 되어야 했고, 모범수가 되어 외부로 출역을 나가는 것이 그나마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했다.

모범수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라는 대로 해야 했고, 때리면 소리 없이 맞아야 했고, 담당에게 오징어와 우유를 잘 챙겨주어야 했다. 관구부장⑥의 구두는 언제나 번쩍거렸으며, 관구실은 가끔 안마실로 변하기도 했다.

작업에 출역하는 모든 재소자에겐 아주 적은 금액의 임금이 계산되는데 경운출역자는 구내 공장 출역자보다 임금이 더 셌다. 경운 출역자는 가다밥⑦도 1등급이었다. 재소자 사이에선 경운출역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너나없이 모범수가 되려고 하니 교도소는 늘 쥐죽은 듯 고요했다.

삶은 지 오래 되어 국수는 불어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밭두렁에 걸터앉아 국수를 먹었다. 뚱뚱보 배불뚝이 경운부장도, 총을 멘 경비교도대원도, 앞니가 누런 따까리도, 담당으로 행세하는 나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맛의 국수를 함께 먹었다.

멀리 길가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아이와 포대기를 챙기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들어갔던 버스가 나올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아내와 우리들 사이 밭이랑에선 늦게 꽃대를 뽑아 올린 무, 그 연보라 무꽃에 구름조각 하나가 살짝 걸쳤다 흘러가고 있었다.

1985년, 여름으로 접어들던 청송교도소 농장의 어느 무더운 날 오후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① 출역 : 작업에 종사하는 재소자들이 사동에서 작업장으로 나가는 일.

② 작업반장 : 작업팀을 대표하는 우량수 재소자.

③ 우량수 : 모범수보다 한 단계 위의 재소자.

④ 따까리 : 작업팀의 간사, 담당직원의 비서역할을 하는 재소자.

⑤ 영치금 : 면회 온 사람이 재소자의 몫으로 기탁하는 돈.

⑥ 관구부장 : 몇 개의 사동을 묶어 한 관구로 정하고 그 관구를 관리하는 직원

⑦ 가다밥 : 일정한 틀로 찍어내는 재소자들의 밥덩이. 재소자의 등급을 5등급으로 분류하여 밥덩이를 배식함. 경운출역 1등급, 병사 및 징벌수용자 5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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