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딩 아들에게 스마트하게 말 걸기

그새 봄방학이다. 반가웠다. 꽃샘추위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세등등한 한파 속에 아침마다 등짐 같은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방학동안 그래도 따뜻한 방안에서 뒹굴뒹굴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다만 뒹굴거리는 두 손에 스마트폰이 없다면 더욱 다행일 텐데. 지난 겨울방학은 하루에 스마트폰을 5분이라도 더 보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었다.

방학을 맞은 아들의 하루일과는 대강 이렇다. 오전 10시쯤 느지막이 눈을 뜬다. 이때는 알람시계도 소용없다. 육성으로 감정을 실어서 깨워야 이불 안에서 발가락 하나가 겨우 꼼지락거리며 태동한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온 아파트에 알리고 나면 뒤늦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들. 가장 먼저 스마트폰부터 연다. 내 머릿속 뚜껑도 같이 열린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한다는 행동이 고작 스마트폰이라니. 빽! 경고음을 발사했다. “메시지 확인하는 거에요!” 밥상을 차려주고 돌아서는데 조용해서 다시 보면 또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두 번째 경고음 발사. 밥을 다 먹고 나면 스마트폰 사용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이후 밀린 숙제를 하고 점심을 먹고 스마트폰을 보다가 학원에 간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저녁 7시. 저녁을 먹고 스마트폰 하다가 숙제를 하고 스마트폰 하다가 잠을 잔다.

▲ 재인 초보엄마

종합하자면 아들이 일어나 밥 먹고 학원수업, 숙제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남는 시간은 전부 스마트폰을 본다는 얘기다. 그 시간에 책을 좀 보라고 권하기도 했으나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용 시간을 따로 정해보기도 했다. 아들은 정해진 시간에 착실히 스마트폰을 했고 그 외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했다. 속에서 천불이 천 번도 넘게 올라왔다. 요즘 아이들이 스마트폰 없이 못 산다는 것은 알지만 내 아들이 그러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너무나 괴로웠다. 아들을 잘 키우려면 ‘조카’라고 생각하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 생각하면 용서되지 않냐고. 그렇겠지, 당연히. 하지만 내 눈앞에서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저 녀석이 조카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한시도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남들은 몰라도 내 아들만은 타고난 자제력으로 스마트폰의 유혹 따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감히 꿈꾸었던 자신이 참으로 못나게 느껴졌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천재 소리를 듣던 아이가 클수록 평범한 둔재였음을 확인하는 엄마의 기분이랄까. 참고로 우리 아들은 지금도 천자문을 알지 못한다.

오죽하면 스티브 잡스가 다 원망스러웠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자기 아들, 딸에게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보지 못하게 했다던가?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집 주인이 자기 식구에게는 짜장면을 먹이지 않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누며 간만에 의기투합!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다. 아침 식탁에서 남편은 “오늘 하루 종일 가족 모두 스마트폰을 보지 말자”고 했다. 하루만이라도 스마트폰에서 벗어나자고. 그런데 아들이 강하게 거부했다. 그런 걸 할 거면 미리 예고하든지 상의를 했어야지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부부는 당황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자연스러울지, 현명한 부모를 벤치마킹하고 싶었다. 일단 인정부터 했다.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음을 사과하고 오늘을 계기로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은 스마트폰 없는 날로 정하자고 했다. 아들은 마지못해 받아들였으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들이 저토록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들어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서” 라고 다시 한 번 취지를 말하고 “넌 뭘 가장 많이 보는지” 물었다. 당연히 게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보는 웹툰이 있었고 친구들과의 카톡, 그리고 게임도 직접 하기보다 게임채널 청취가 많았다. (바로 잡는다. 직접 하는 것만큼이나 게임채널 청취도 자주 한다.) 요즘 뜨는 ‘BJ'의 게임방송을 얘기할 때는 아들의 눈에서 별이 반짝거렸다. 알고 보니 아들이 자주 쓰는 외계어도 그 BJ가 유행시킨 말이었다. 예전에 내가 장국영을 좋아했듯이 너는 게임 BJ를 좋아하는구나. 아들이 신나서 들려주는 게임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반짝이는 눈빛 너머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나의 우상은 장국영이었다. 천녀유혼, 영웅본색 등 홍콩영화 전성기였다. 뜨거운 인기를 타고 장국영은 국내에서 초콜릿 광고도 찍었다. 그 초콜릿을 일부러 사먹은 것은 당연했고 포장지 뒷면에 편지도 썼다. 당시 펜팔이 유행이었다. 대전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친구와 3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친구도 장국영을 좋아해서 장국영 얘기만 써도 편지지가 부족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어른들과 꽉 막힌 학교생활이 답답했던 내게 장국영과 펜팔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장국영 광고 팸플릿을 구해서 방에 붙여주시기도 했다. 별 거 아닌 사진 몇 장이었지만 나도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던 것 같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때 엄마에게 받은 것은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마치는 대로 아들에게 카톡을 보내봐야겠다. 이모티콘도 하나 선물해야지. 보내는 법을 알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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