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만들어진 국민주택단지는 지금..

‘숯골마을’이 있다. 지리산 아래가 아니다. 집현산 아래도 아니다. 진주시 신안동이다. 진주시 신안동이라면 진주에서는 알아주는 주거단지다. 고층 고급 아파트들이 줄 지어 있고 법원과 검찰청이 있는 곳이다. 그런 신안동에 숯을 굽는 숯골마을이라니. ‘국민주택단지’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진주시 신안동 숯골마을은 왜 숯골이 되었는지, 국민주택단지는 왜 국민주택이 되었는지 잘은 모르겠다.

국민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 외우며 국민의례를 하고 국민체조를 배우던 세대는 ‘국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일단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갖는 제국주의적ㆍ국가주의적 의미는 내버려두고 일단 국가에서 인정하고 국가에서 보증하고 국가에서 알아준다는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국민주택단지가 생겨난 내력을 짐작해 본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진주성 정비사업이라는 것을 했다. 지금은 진주성 안에 민가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당시엔 제법 많은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르긴 해도, 임진왜란 때부터 조상대대로 눌러앉아 살던 사람일 것이다. 사적지에 민간인이 살고 있어서 유적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정비사업을 한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무작정 이들을 내쫓을 수는 없어서 일정한 공간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옮겨 살도록 해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방법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국민주택단지의 집들은 모양도 크기도 고만고만하다. 원래 동네 이름은 숯골이었던가 보다. 그 숯골을 국민주택단지로 환골탈태시켜 버린 것이다. 군소리 없이 이사한 이들은 국가의 말을 잘 듣는 선량한 국민이 되었다.

처음 국민주택은 멋진 신세계였다. 모양은 비슷비슷하지만, 당시 진주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번듯한 양옥이었다. 서양식 주택은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마당엔 정원수 한두 그루를 심었다. 이국적으로 파초를 심은 집도 있었다. 방은 크고 거실은 멋졌다. 수세식 화장실에 입식 부엌이었다. 옥상 빨랫줄은 팽팽하였고 건물을 이루는 석조물들도, 으리으리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꽤 값비싼 재료였다. 정든 삶터를 등진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구러 40년 넘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국민주택단지는 진주시의 대표적 낙후 동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른 동네에 수십 층 아파트 또는 빌라가 들어설 때 국민주택은 조용했다. 도로가 넓은 다른 동네에 시내버스가 여러 대씩 지나다니는 데도 국민주택엔 일방통행 좁은 도로에 가끔씩 다니는 버스가 이곳이 ‘진주시내’임을 알려줄 뿐이다. 단정하고 산뜻한 2층 양옥은 세월의 풍파에 닳고 낡아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국민주택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다. ‘서민’ 주택단지로 전락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1년 7월 진주시의회 배 아무개 의원이 평거동주민센터에서 국민주택지역 주민 대표 20여 명과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한 간담회를 연 적이 있다. 시의원은 이런 일도 하라고 만든 제도다. 간담회에서 주민들은 일방통행과 좁은 도로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사고와 주민불편을 호소하였다. 많은 어르신들이 살고 있는 데도 변변한 경로당이 없어 불편하다며 대책 마련을 건의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재구성해 본다. 신안동 국민주택(숯골)지역은 1980년대 진주성 내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진주성 정비계획에 의해 이주해 온 곳이다(1980년대까지 계속된 사업이었던가 보다). 좁은 도로에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교통사고가 잦았다. 간담회에 참석한 진주시청 건설과장은, 전선을 지중화하여 보행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한전과 협의했지만 많은 경비와 한전 사업 우선 순위에 밀려 가능성이 낮다. 선으로 되어 있는 인도와 차도에 경계석이나 펜스를 설치하여 보행자 안전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회복지과장은 국민주택지역에 경로당 신설은 실무에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자부담 재원 확보, 예산과 부지 확보의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덕분에 좁은 일방통행 도로에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생겼다. 걸어다니는 사람은 그만큼 안전해졌는가. 그럴 리가 있나. 차도와 인도의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차할 곳이 없는 자동차들이 제멋대로 점령해 버렸고 간혹 양심이 메마른 사람들이 밤에 몰래 던져 놓은 쓰레기가 흉측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길고양이들이 쓰레기 봉지를 뒤져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진주시에서 폐회로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 아래를 지나가면 웬 젊은 여성이 “쓰레기 불법 투기 단속 중입니다. 적발될 시 과태료 100만 원을 물립니다”(내용은 이와 조금 다를 듯)라고 방송한다. 하도 느닷없는 안내 방송, 경고 방송이어서 길 가는 사람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일방통행 좁은 이 찻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은 한나절에 한두 명 될까 말까 하니까.

일방통행 입구 구멍가게는 ‘국민주택 140호 마트’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라면 해 드립니다’라는 홍보 글귀를 보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불쑥 들어가 주인 할머니 라면 솜씨를 맛보고 싶어진다. 누추하고 비좁은 가게에 수십 년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라면 맛도 깊고 아득할 것 같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라면을 먹어보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막걸리, 소주를 사 본 적은 있지만.

국민주택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300살은 넘었다. 진주시청에서 만들어 놓은 ‘보호수’ 지정 팻말에, 1982년에 수령이 270년쯤 된다고 했으니 지금은 300살은 거뜬히 넘은 것이다. 지날 때마다 그 크기와 높이를 가늠해 보지만 목만 아플 뿐이다. 느티나무 아래 비닐천막 안에서는 늙수그레한 아저씨와 아지매들이 막걸리 내기 고스톱을 치고 있다. 그 막걸리는 길 건너 편의점에서 살까, 아니면 국민주택 140호 마트에서 살까. 보호수의 보호를 받으며 찬바람을 외면한 그들의 입가엔 어떤 미소가 돌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시내버스 2개 노선이 한 시간에 서너 차례씩 휘돌아나가는 국민주택단지에는,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세탁소, 중화요릿집, 목욕탕, 고깃집, 슈퍼마켓, 식당, 어린이놀이터, 참기름집, 이발소, 미용실, 이삿짐센터, 피아노학원, 새마을금고 들이 제 위치에서 제 구실을 잘 하고 있다. 그런 가겟집들에 손님이 얼마나 드나드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가겟집들은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 자동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소문을 듣는다. 좁은 길 양쪽에 차를 대는 바람에 시내버스 다니기 좀 불편해 보일 때도 있다. 나는 그래도 퍽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집은, 간혹 집에서 짜장면을 시키면 기본으로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그래도 기다려서 먹거나, 그래서 포기하곤 한다. 토요일 점심 시간에 작정을 하고 가족과 함께 가게에 직접 찾아가 보았다. 고만고만한 밥상 6개가 전부인 중국집에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낮 12시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세 손님이 들어오고 다른 손님이 그 뒤를 잇는다. 맛은 좋다. 손님들 행색을 보아하니 동네 사람들만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소문이 더 많이 나서 국민주택단지에 사람들이 좀 득시글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탄구이 전문점도 손님 발길 끊길 날이 없다. 퇴근 시간 무렵 연탄구이 전문점 앞을 그냥 지나가는 건 참 어렵다.

요즘은 국민주택도 변신을 꿈꾸고 있다. 숯골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원래 있던 집을 재건축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한 골목에 한두 집은 새단장, 구조 변경(리모델링)을 한다. 어떤 집은 옥상에 임시 건물을 얹어 창고로 활용한다. 어떤 집은 아예 집을 허물고 5~7층 빌라를 짓는다. ‘원룸, 투룸 있음’, ‘분양 안내’와 같은 안내 펼침막을 여러 차례 본다. 방 구조는 어떤지, 그 원룸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사람이 세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주택의 겉모습을 변화시키는 데는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라는 이름을 감지덕지 안고 있던 사람들이 국민보다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행복을 찾아나서는 것일까. 국민으로 조용히 살며 한 푼 두 푼 모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큰 아파트로 새 삶을 찾아 떠났을까. 오래된 집들과 새로 짓는 집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담벼락이 생겨나지 않을까. 번듯한 원룸에, 투룸에 세 드는 사람들은 진주성에서 쫓겨나와 새로운 터전을 일구어낸 사람들의 맵고 짠 삶을 이해하기나 할까. 숙호산, 석갑산 텃밭에서 상추, 딸기, 머위, 앵두, 대파, 매실, 뽈똥, 오디 따위를 수확하여 길가 먼지구덩이에서 길손님의 눈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할매들은 올해도, 내년에도 거기 그 자리에서 손주 용돈 몇 푼이라도 벌 수 있을까.

국민주택단지를 더 예쁘게 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돋보인다. 촉석 청실회는 지난해 4월 국민주택단지 집들의 담벼락에 예쁜 그림을 그려 주었다. 분홍돌고래 위에 올라앉은 아이들은 40여 년 전 진주성에서 뛰어놀던, 지금은 초로가 되었을 아이들일까, 아니면 지금 국민주택을 벗어나려고 형설지공을 쌓고 있는 청춘들일까. ‘LEE. S. B.’라고 자신을 밝힌 어떤 분은 이 동네 사람들에게 무릉도원을 선사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퍼석퍼석해진 담벼락에 생기가 돌고 이웃들 간에도 새롭게 나눌 이야깃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기부한 재능이 무척 고맙기만 하다.

국민주택이라는 이름에 짓눌린 숯골마을의 옛 전설은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숯 굽던 사람들은 어디로 쫓겨갔을까. 그들의 후손과 친척들과 친구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높고 큰 교회당을 드나드는 이들과 어떤 인연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자주 다니지 않는 시내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숯골과 국민주택이라는 이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는 어느 시대의 유물일까. 그래도 왜 숯골인지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던 것인데….

택시를 탔다. 위 글을 웬만큼 써 놓고 밥 먹으러 걸어갔다가 오는 길에 춥고 배부르고 피곤하여 택시를 탔다. 국제아파트 가자고 하니 기사 양반이 “숯골예?”라고 되묻는다. 그래서 물었다. “숯골이 왜 숯골입니까?” 기사 양반이 대답한다. “숙호산이라고 있지요? 잠자던 호랑이가 깨어나는 산, 숙호산. 대아고도 있고…. 그 숙호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숙호골’이라고 불렀답니다. 숙호골, 알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숙호골이라고 말하기 힘드니까 자연스럽게 ‘숙골’이라고 불렀고, 그게 또 이상하니까 ‘숯골’이라고 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숯을 구울 데가 어디 있어요? 숯을 구우려면 소나무나 참나무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게 어디 었어요? 아, 저요? 예전에 문화해설사를 좀 했었죠? 하하하.” 처음으로 정설을 만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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