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엄마의 본심

지난 해 중딩 1학년 아들의 용돈은 일주일에 5천 원이었다. 주 5일 수업제에 기반을 두고 하루 천 원씩의 소비를 권장하는, 나름으로 합리적인 용돈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점심은 급식으로 해결하고 책값은 별도로 지급하며 차비는 교통카드를 따로 충전해 주었기에 용돈의 지출항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오직 간식비용. 그렇다면 매주 5천 원도 충분하다는 것이 나의 계획이고 심산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 월요일마다 5천 원을 받아간 아들은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되면 가엾은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너 용돈 벌써 다 썼어?” “학교 앞에서 닭꼬치랑 삼각김밥, 음료수 하나 사 먹었을 뿐인데...” 하긴 요즘 물가가 워낙 비싸니까. 하는 수 없이 그때마다 3천 원, 4천 원씩 추가비용을 따로 지급했다.

그런데 푼돈이 무섭다고 아침마다 아들 용돈을 채워주다 보니 어느 새 내 지갑이 눈에 띄게 홀쭉해져 갔다. 들어가라는 배는 안 들어가고 지갑만 쏙 들어가는 상황. 게다가 아들은 돈을 주면 주는 대로 다 쓰고 왔다. 5천 원을 주면 5천 원을 쓰고 만 원을 주면 만 원을 썼다. 금전출납부 작성을 권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며칠 반짝 하더니 금세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가계부라고는 평생 써본 적이 없는 모계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이 나이 먹도록 계산에 약해서 실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나의 물러터진 소비습관까지 대물림할 순 없었다. 아들과 용돈 협상에 들어갔다. 그렇게 절충한 금액이 일주일에 만 원. 용돈 100% 인상이라는 과감한 결단에는 조건이 있었다. 단, 추가지출은 없다는 것, 일주일에 만 원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것.

▲ 재인 초보엄마

용돈의 색깔이 바뀌면서 아들의 얼굴 표정도 한결 밝아지는 듯 했다. 약속한 대로 아침마다 돈을 더 요구하면서 손을 벌리는 일도 없어졌다. "역시 현실물가를 감안하면서 중딩 아들의 무분별한 소비습관도 바로잡은 현명한 결정이었어." 스스로 흡족해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지출이 발생했다. 아들의 교통카드를 충전하는 시기가 점차 빨라진 것이다. 보통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통카드 3만원을 충전해 주었는데 그 기간이 한 달 반에서 한 달... 갈수록 앞당겨졌다. 어차피 학원을 오갈 때는 학원차량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친구를 만나거나 주말에 시내에 나갈 때를 제외하곤 교통카드를 쓸 일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아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확인 결과, 아들은 교통카드를 마치 신용카드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교통카드를 내면 대신 결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들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트코인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아직도 개념이 잡히지 않는 비트코인에 버금가는 교통카드의 쓰임이라니.

대체 돈을 어디에 쓰기에 교통카드까지 현금으로 쓰냐고 따져 물었다. 우물쭈물 하던 아들은 친구들이랑 편의점에 가면 과자값이나 컵라면값을 자기가 대신 내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 했다. 혹시 학교폭력과 관련이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 했다. 다만 아들이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가서 한턱 쏘는 행위를 벌써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그 애들은 용돈 안 받아? 친구 누구누구?” “그래야 애들한테 인기가 많아지니까요.” 아들이 말한 친구들 중에는 아버지가 의사인 친구도 있었다. 비정규직 엄마가 채워준 용돈으로 고소득 전문직 의사 아들의 컵라면 비용을 대신 내 주다니.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아들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친구를 좋아하는 건 이해하지만 돈으로 산 친구는 오래 못가. 그런 친구는 니가 돈이 없으면 같이 안 놀아줄 테니까.”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받고 교통카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새해 어느 날 저녁, 가족들과 대안동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주차장을 막 벗어나려는데 입구에 걸인이 앉아 있었다. 추위에 떨면서 맨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워 “저 아저씨 너무 추워 보인다. 잔돈이라도 있으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이 차문을 벌컥 열고 나가더니 그 아저씨 앞에 놓인 깡통 안에 돈을 넣고 돌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역시 우리 아들, 장하다! 아저씨한테 드린 거야? 얼마 드렸어?” “오천 원요!” 아들의 선한 행동을 칭찬하던 나는 오천 원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상이 돌변했다. “뭐, 오천 원? 너 오천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 사람이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지. 엄마가 분명히 잔돈이라고 했잖아. 왜 엄마 말을 끝까지 안 듣고 그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급속 냉각되었다. 평소 아들의 소비습관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러니 용돈을 다 쓰고도 부족해서 교통카드를 현금처럼 쓰고 다녔지." 아들은 말이 없었고 조용한 차 안에서 나는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얼마쯤 갔을까. 초등학생 딸이 물었다. “엄마, 근데요. 아까 그 아저씨한테 오천 원 주면 왜 안 돼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거는... 음... 아저씨한테 오천 원을 주면... 오천 원이 큰 돈이잖아. 그래서 그 아저씨가 열심히 일을 안 할 수도 있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서 아들은 사과했다. “엄마, 미안해요. 이제는 엄마 말씀 끝까지 듣고 행동할 게요. 잘못했어요” 나는 아들을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엄마도 너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사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단돈 오천 원에 본심을 들켜버린 어리석고 경솔했던 나의 행동을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드러나지 않는 좋은 일에 오천 원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써도 괜찮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리고 현실의 벽 앞에서 순순히 한계를 인정하고 욕심을 포기하며 살아 온 나를 한 번쯤은 이해해 주고 싶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