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의 복판을 뒤집는 일, 신중해야"

‘형평탑’ 앞에 크레인이 섰다. 최 참의관 집과 그 옆으로 늘어섰던 기념품 상점, 밀림 아이스케키 집과 박용수 선생의 사진관, 옛날 성남교회, 사방관리소 분성여관, 대원 재식 영란이네 집 그리고 무화과 나무 소담했던 내 유년의 집은 이제 한 무더기 흙으로 쌓여있다.

내일이면 형평탑도 배 건너 강변으로 옮겨질 것이다. 우선 매장문화재의 부존 여부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얻은 귀한 땅에다 무엇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못 본채 옮기는 것이 찜찜하다. 그러나 근 20년 동안 계획만 무성했을 뿐 건드리지 못했던 도시 복판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그 뉜들 함부로 하랴’ 라는 깜냥으로 지켜본다.

▲ 홍창신 자유기고가

천년 고도의 복판을 뒤집는 것은 신중해야 할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문화재청서 고시한 ‘발굴조사의 방법 및 절차에 관한 규정’을 들여다보니 조사절차도 만만치 않다. 자료조사 지표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에 들어가는 모양인데 지금이 아마 시굴에서 발굴로 들어가는 단계인가 보다. 문화재청장의 발굴허가가 나면 전문가 회의에서 정밀발굴조사 필요성에 관한 검토를 거친 연후 조사 진행 방향을 설정한다. 조사를 진행하는 중 유적의 성격 등이 학술적 판단을 요할 경우 관련 전문가를 초빙해 견해를 듣는다. 필요하다면 학술자문 회의를 열어 고고학적 판단을 얻는다. 대충 일별해도 몇 개월로 될 일은 아니다. 기왕에 매장된 귀물의 출현을 바라는 한편 광장조성을 쫀쫀히 논의할 시간도 벌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해본다. 물 얻기 쉬운 강가에 생긴 취락의 연원이 천년이 능히 넘으니 파면 뭘 얻어도 얻지 않겠는가.

100년 이후를 내다보고 축조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그 골동적 가치를 평가받으며 관광수입을 올리는 유럽의 고도가 부럽기도 하지만 남강과 진주성이 지닌 아름다움 또한 이에 손색이 없노라 자위해 왔다. 그러나 성을 둘러싸고 형성된 묵은 도심의 퇴락은 비껴갈 수 없는 심각한 부조화로 드러나고 있다. 평거 금산 초전 가좌 등 외곽지역의 급속한 재개발만큼이나 방치된 도심은 그 기능이 갈수록 약화하는 것이다. 남강과 진주성이라는 보배를 곁에 두고 누려왔던 고유한 공간적 속성마저 차단당할 즈음에 얻은 것이 성 아래 이 ‘터’다. 이 터는 쇠퇴하는 도시기능을 재생하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운용할 것인지에 시민적 관심이 집중됨은 당연하다.

나는 ‘진주대첩광장’이란 이름부터가 못마땅하다. 대첩이란 크게 승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임금이란 자는 궁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온 강토와 백성이 처참하게 도륙당한 난리였다. 시쳇말로 콘트롤 타워가 달아난 가운데 치른 그 애 터지는 전쟁에서 겨우 세 곳의 승리처가 있었다. 그중 하나로서 파죽지세의 적을 죽을 힘을 다해 성 밖으로 밀쳐낸 곳이 진주이긴 하다. 그래서 그 임진년 승전의 훈공은 장수들에 돌아가고 대대로 칭송됐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주검의 대가인가. 적이 성 밖 해자를 메우는데도 성을 향해 활질 할 토성을 쌓는데도 동원된 이는 성 밖의 우리 백성이었다. 그나마 이듬해 계사년 싸움에선 모두가 몰살한 참담한 난리였다. 되뇌기엔 너무 아프고 속상하는 사실이다. 유불리나 호오에 무관하게 보존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 ‘역사’란 물건이라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과 비전으로 채워 마땅한 새 광장에다 ‘대첩’ 자를 붙이자는 발상은 참으로 마땅찮고 언짢은 것이다.

그 외, 지하주차장 문제를 비롯한 쟁점이 될 문제의 졸속 시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이창희 시장이 시민사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반영할 것이라 약조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공청회에도 참석해 그런 방침을 공공연히 밝혔기에 독선적이란 그동안의 우려를 가라앉히기도 했다. 공청회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고 그런 과정을 거쳐 뜻을 모아가면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최근 일부 관변의 우호적 인사들로 광장조성위원회를 구성해 작전하듯 ‘해치울 것’이란 세간의 우려가 있어 시장의 언약에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시장으로서는 정해진 임기와 배정된 예산의 처리시한 등이 걸려있으니 얼른 진척시켜 성과를 내고 싶을 것이다. 그에 비해 시민사회의 의견수렴이란 것이 일사불란하고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무척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만 떨어져 생각해봐도 이 일이 그런 것들에 쫓겨 서두를 사안이 결코 아님을 알 것이다. 천년고도 진주의 고갱이를 건드리는 일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사려 깊은 결론을 얻게 되길 바란다. 어차피 우리는 한 시절 잠깐 머무르다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형평탑 이전에 관한 일각의 논란에 관해 이참에 짚고 싶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최종의결기구인 이사회에서 ‘탑’의 ‘존치’입장을 결의하고 진주시에 공문으로 통보한 것이 2016년 4월 8일이다. 그 후 시장은 시민 대표와의 만남과 이후 열린 공청회에서 ‘시민 의견수렴’을 공언했다. 이후 다중의 논의를 통해 광장의 성격이 규정되면 그 컨셉에 따라 마땅한 위치에 다시 거취를 정한다는 것이 형평의 일관된 입장이다.

형평은 2003년 개편대회를 연 이후 《실질적 인권운동》을 목표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백정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춰 왔다. ‘탑이 어디에 있느냐’의 허울에 천착함이 아니라 ‘탑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이냐’에 주목하고 있음을 형평의 일원으로서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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