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내 감정이 볼품없는 양푼에 담겨 있음을 나는 보았다.

이웃 할머니 김장김치는 정말 맛이 없었다. 김장을 할 때마다 도와준답시고 가서 거들면 맛보라고 김치를 싸 주는데 가져오긴 하지만 우리 밥상 위에서는 천덕꾸러기로 떠돌다 영락없이 버려진다. 그 맛없는 김장을 할 때면 도시에 사는 늙수구레한 아들과 딸들이 다 모여든다.

아들과 딸들은 문간에 차를 세워놓고 김치통을 내린다. 김장을 하는 마당가에 김치통이 산처럼 쌓인다. 할머니가 품앗이로 벌어놓은 이웃 할머니들이 김치 속을 넣는 사이 할머니의 아들과 딸들은 마당가에 걸린 가마솥에서 삶은 돼지고기를 꺼내와 저들끼리 왁자하게 판을 벌인다.

‘배추포기 큰 거는 이 통에 담고...’ 김치 속을 넣고 있는 이웃 할머니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할머니는 하나하나 김치통을 챙기신다. 큰아들 것을 먼저 담고, 다음은 작은아들, 다음은 큰딸, 다음은 작은딸 순서로 김치통을 채운다. ‘양념 아끼지 말고...’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춤을 잡고 쉼 없이 김장판을 기웃거리며... 김치를 챙기신다.

▲ 김석봉 농부(전 녹색당 대표)

점심나절을 지나자 바람은 많이 차가워졌고, 돌담에 기댄 늙은 감나무에서 언 홍시가 떨어진다. 가득 채운 김치통을 싣고 작은아들이 먼저 떠나고, 큰딸과 작은딸이 떠나고, 큰아들이 마지막으로 떠났다. 할머니와 품앗이 온 이웃 할머니들과 볼품없이 자란 속이 덜 찬 배추와 다라에 찌꺼기처럼 들러붙은 약간의 양념만 남았다.
양념이래야 좋은 고추는 다 내다팔고 서리 내릴 무렵에 딴 끝물고추를 써서 꺼칠꺼칠한 고춧가루에 멀건 육수 붓고 멸치액젓과 마늘 생강 넣어 버무렸을 것이었다. 몇몇 남은 이웃할머니들이 할머니 몫의 김장을 하는 마지막 손놀림을 보면서 나는 이 김치가 맛이 없는 이유를 알았다.

우리 집 김장이 끝났다. 무농약 무비료로 직접 농사지은 것들을 썼다. 배추는 속이 잘 차서 통통했고, 무는 알맞게 자라 단맛이 뱄다. 고춧가루는 탄저병이 들기 전에 딴 초벌고추를 빻아 색깔이 진홍빛으로 곱다. 봄에 캐서 보관해 둔 육쪽마늘도 여전히 여물었고 생강과 쪽파와 적갓도 김장에 쓸 만큼 넉넉하게 수확했다.

아내의 김장은 예사롭지 않다. 음식공부를 꽤나 한 탓에 건성으로 담글 수는 없었고, 몇 년 전부터 우리 김장김치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최고의 맛을 내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과일로 단맛을 냈고, 멸치액젓은 우리가 담근 것을 내렸다. 갖가지 재료를 듬뿍 넣어 끓인 진한 육수에 찹쌀풀을 섞었다.

우리 김장김치는 맛이 좋았다. 김장을 거들러 온 이웃할머니들도 우리 김장양념 앞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김장이 끝나면 한 쪽씩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가벼운 다툼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해는 기울고 아내는 절인 배추포기처럼 지쳐 쓰러졌다. ‘일을 하자니 약을 사 먹어야 하고, 일을 하지 않으려니 굶어야 한다. 일을 하면서 죽을 것이냐, 굶어서 죽을 것이냐.’ 얼마 전 페북친구가 전해준 이 글귀를 떠올리며 나도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욕 봤네... 내년부터는 김장을 줄여야지...’ 새벽녘 아내의 기척에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내는 밤새 끙끙거렸었다. ‘겨울 나려면 그래도 김치를 담가야지...’ 송장처럼 누웠던 아내가 장롱으로 돌아눕는다. ‘첫차로 나가서 뜨건 물에 풀고 한의원에 가봐...’ ‘...’ 대화는 짧았다. 나이 들어 노동으로 지친 몸이 쉽게 풀리겠는가. 청춘의 날들도 잊혀져가는 나이 든 노동에 사나흘 허리를 두드리면서 부항기에 몸을 맡겨야겠지.

화목보일러에 나무를 넣고 들어오는데 부엌 한 쪽에 김치가 가득 찬 양푼이 보였다. 엊그제 김장을 도와주러 가서 받아온 이웃집 김치였다. 맛도 보지 않고 그대로 밀쳐두어 볼품없이 꺼실꺼실 말라있었다. 저 김치를 어떻게 하나. 아, 순간 나는 저처럼 말라버린 내 감정이 거기 양푼에 담겨 있음을 보았다.

재료만으로 김치가 얼마나 맛나겠는가. 재료만으로 김치맛이 좋게 난다면 세상에 맛있는 김치는 널렸을 것이다. 굳이 우리 집 김치를 찾는 이도 없을 것이다. 초벌고춧가루와 끝물고춧가루의 차이가 어찌 사람의 정에 앞서겠는가. 아내의 김치가 어찌 재료의 맛이겠는가. 아픈 몸을 끌면서도 배추밭에서부터 김칫독까지 쏟은 정성을 어찌 재료에 비기겠는가.

오늘 아침 밥상에 저 김치양푼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꺼실꺼실 말라붙은 내 늙은 감정에 이웃할머니의 삶을 얹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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