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 따라 내려오는 추위에 불러보는 어머니

지리산 너머 먼 바다로 태풍이 지나가나보다. 알록달록 물든 나뭇가지가 세찬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리고, 팥을 베는 손길에 부쩍 힘이 더해지는 오후. 남쪽으로 많이 기운 햇살이 아직은 따뜻하다.

들깨를 터는 이웃 할머니 밭에서 도와드린답시고 오전 한나절을 보냈다. 새참으로 싸온 홍시와 메마른 떡조각을 앞에 놓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가늘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영감 거기 누웠지만 말고 날 좀 도와주소.’ 할머니의 눈길이 머무는 밭 언저리엔 석물 하나 갖추지 못한 조그만 무덤이 하나 있고, 할머니가 죽으면 놓일 자리인 듯 오른쪽으로 약간 터를 넓혀둔 묘지였다.

▲ 김석봉 녹색당 전 대표

할머니의 영감은 술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떴다고 했다. 성질이 고약하고 사나워 많이 맞으며 살았는데 맞다가 죽을까봐 이웃으로 도망을 치면 이웃들이 할머니를 숨겨주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그런 영감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입에 올리는 것은 무슨 심사일까. 타작을 하는 동안 할머니의 그 심사가 자못 궁금했다.

깨 타작이 끝나고 도리깨며 갈고리와 같은 연장을 챙기면서 넌지시 말을 붙였다. ‘할매는 좋겠네. 이리 영감 가까이서 일하고...’ ‘그래도 이 밭에 오면 산돼지 걱정은 안 들어...’ ‘와요. 영감이 지켜줘서?’ ‘......’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덕석 위의 깨알을 쓸어 담는 할머니 등 너머 무덤가엔 활짝 핀 감국 한 아름이 한들거리고 있었다.

팥을 베다 밭두렁에 주저앉아 잠시 쉬는데 멀리 개울가 3층짜리 요양원건물이 보였다. 며칠 전엔 마을 할머니 한분도 저 요양원으로 갔다. 불현듯 부산 요양병원의 침대에 누워서 하루, 한 달, 한 해를 살고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부산 어머니한테 한 번 가봐야 안 되나...’ 며칠 전 새벽에 아내가 말을 붙여왔었다. ‘바쁜 일 끝내놓고 한번 다녀오지 뭐...’ ‘이번엔 나도 따라 갈라고...’ ‘그러지 뭐...’ ‘가까우면 자주 찾아가 볼 건데... 저 아래 요양원으로 모셔오면 안 돼요?’ ‘안 돼...’

그날 새벽 나는 모로 돌아누워 한참을 침울해 있었다. 안 되는 이유가 너무 작위적이고 궁색해서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호적부에 어머니의 자식은 일흔 살을 넘겨 병든 몸으로 멀리 의정부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전부이시다. 지금의 어머니는 무연고자이시고, 의정부의 병든 일흔 살 여인이 부산으로 직접 오지 않으면 주검마저도 우리가 돌볼 수 없는 처지이시다.

어머니는 좌익활동가 남편을 전쟁통에 잃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곳에서는 살 수 없어 경상도 외딴 마을로 들어왔다. 그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온 딸이 의정부의 그 여인이다. 어머니는 애 못 낳는 정처를 대신해 후처로 들어와 살면서 우리 형제자매를 낳았으나 호적부엔 정처의 자식으로 등재되었다. 형과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어머니의 자리에 불러들이지 못했다.

가을걷이로 집안에 이런저런 먹거리가 늘어간다. 들깨 몇 됫박 털어 담은 자루도 있고, 호두를 담은 자루도 있고, 고구마도 상자째 쌓였고, 누렁호박도 굴러다닌다.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왜 무슨 이유에서 ‘안 돼...’라고 단호히 말했을까.

초승달이 서산머리에 얹혔다. 바람도 많이 잠잠해졌다. 산그늘을 따라 추위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부산에 가게 되면 요양병원 옆 골목 따뜻한 돼지국밥을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시면 아버지 무덤 곁에 먼저 묻힌 정처의 무덤과 나란히 묻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