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정확해야 뜻을 이룬다"

“아가(동무)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의 동요 ‘달맞이’ 1절이다. 50-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노래는 어린 시절을 아련한 감상으로 추억하게 한다.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어린이들의 남루한 입성을 가려 주는 유일한 장식물로 앵두가 등장한다. 앵두의 이미지가 둥근 달의 넉넉함으로 이어져 동심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 박흥준 상임고문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가수 김정애가 50년대 중반에 내놓았던 가요 ‘앵두나무 처녀’는 산업화와 함께 이농이 시작되면서 널리 불려졌다. 노래의 리듬과 선율은 경쾌하지만 가사는 슬프다. 우리의 누이들은 왜 서울로 가야 했을까. 서울에 가서는 삶이 나아졌을까. 여공으로 조출철야를 밥 먹듯 하고, 식모살이로 고생하고, 더러는 술집에서 인격을 짓밟히고... 서러운 인생이 노래와 함께 했다. ‘앵두나무 우물가’는 정겨움과 회한의 상징이다. 물 긷는 처녀들이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얘기하던 그 곳, 돌아가야 할 장소이다.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가수 최헌도 지난 70년대에 앵두를 호명했다. 앙증맞은 앵두의 이미지를 입술에 포개 사랑을 형상화하고 앵두가 떨어지면 사랑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해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가사에 담았다. 왜? 시간이 흐르면 앵두는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이 노래에서 앵두는 사랑과 믿음의 다른 이름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중국이 원산지인 앵두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이다. 4월에 흰색 또는 분홍색 꽃이 피며 6월에 열매가 빨갛게 익는다. 꽃은 우아하고 열매는 예뻐서 관상가치가 높다. 맛도 훌륭한 앵두는 청량제이고 독이 없어서 안색을 곱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상큼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앵두가 요즘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유등축제를 유료화하면서 진주시가 진주교와 천수교에 가림막 대신 꼬마전구 터널을 설치하고 여기에 ‘앵두등’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6월에 열매가 익는다는 백과사전의 설명을 정면으로 배반해 앵두가 10월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격이다.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이 유등을 보는 걸 방해하는 용도로 예쁜 ‘앵두’가 사용되고 있으니 시민들이 불쾌해 하는 건 당연하다. SNS에서는 요즘 “누구 맘대로 앵두라는 이름을 쓰느냐”부터 시작해 “앵두를 욕보이지 말라‘는 내용까지 볼멘 소리가 무성하다.

 

“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며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면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며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면 형벌이 바로 되지 않고 형벌이 바로 되지 않으면 백성은 수족을 둘 데가 없어지므로 군자는 명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논어 자로 편에 나온다. 공자의 정명사상을 표현한 이 글은 일의 성사에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출발점인지를 가르친다. 말(기표)이 정확(기의)하지 않으면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이루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시비와 선악의 표준이 곧 말(정명)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오늘 이렇게 바꿔보았다.

 

“예산지원이 줄었다는 주장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으면 유등축제 유료화(앵두등)는 순리에 맞지 않으며, 순리에 맞지 않으면 축제가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하지 못하면 사후 평가가 바로 되지 않고, 바로 되지 않으면 시민들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으므로 진주시는 명분에 맞게 유등축제 유료화 중지(앵두등 폐기)를 선언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동요와 가요에 나오듯 앵두는 우리의 동심이며 정겨움이며 사랑이며 서러움이며 추억이다. 앵두는 예뻐야 한다. 그런데 유등축제에 등장한 앵두는 그렇지 않다. 시민들이 의미의 전복에 분개하는 이유이다. 앙증맞은 앵두가 수난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꼬마전구가 훼손되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잘못 불려 나와서이다.

 

가요 ‘앵두나무 처녀’ 3절은 이렇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