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여. 밥 한 공기 가득 맛있게 드시게"

눈을 뜨자 빗소리가 세차다. 어둠이 짙은 새벽,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혼자 듣고 있는데 아내도 깨어 있었는지 '빗소리가 참 좋다'며 혼잣말처럼 속삭인다. '그래 좋네. 새벽 빗소리 참 오랫만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아내도 나처럼 어둔 천정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혀 심란할 것이다. '우리 고구마는 언제 캘라고?' 뜬금없이 고구마 이야기다. 좀 더 낭만적인 이야기도 있으련만 살아갈 일이 더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고구마는 우리집 농산물 중 단연 으뜸으로 매년 백 상자 넘게 캐서 팔아 겨울을 났다. 올해는 재배면적을 늘여 더 많은 고구마를 캐서 팔아야하는데 그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고구마밭을 돌아보고 올 때마다 심상치 않은 소비경제에 저 고구마를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추석에 아들 부산 할머니 찾아보고 오라고 해야겠는데...' '뭐한다고, 그냥 내가 다녀오면 되지. 애들에게 부담주는 일인데...' '그래도 할 일은 해야 안 되것소. 할머니 서하 보고싶어 하던데...' '지난 번에 보니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감정도 없더라. 본다고 알아볼 리도 없고...'

▲ 김석봉 농부 (전 녹색당 대표)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빗소리가 가늘어졌다. 써늘해서 보일러를 켰다. '견딜 만한데, 기름 드는데...' '냉바닥에 감기 걸리기 쉽다. 조금 틀고 끄지 뭐...' '비가 많이 와야 되지요?' '무 배추밭이 많이 가물어서 많이 좀 와야되는데... 어제 시금치씨 잘 넣었네...'

가끔 침묵이 흘렀다. 참 오랫만에 나누는 새벽 대화에서 새삼 아내가 곁에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주말 아들과 벌초를 다녀오면서 팟캐스트 라디오방송에서 들은 '최백호'의 '하루 종일'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지인이 요양원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만들었다는 노래였다. 코끝이 뜨거워지는 노래였다. 이후 해가 설핏하면 마당가 의자에 기대어 이 노래를 찾아 듣곤 한다.

'우리는 노후 준비를 하지 않아서 큰일이네...' '오늘 또 한의원에 가야지. 몇시에 갈라고? ' '아침 먹고 아들보고 태워달라고 해 봐야지... 안 되면 첫차로 나갈 거고...' '오늘 대목장이다. 뭐 좀 시장을 봐야지...' '부산 큰집에 탕국도 끓여 가야하고, 산적꺼리도 사야 하고...' '나물도 다섯 가지는 해 가야 안 되나...' '그거는 집에 있는 거로 해도 되는데...'

빗소리가 멎었다. 창이 훤히 밝아온다. 아내는 허리를 많이 아파한다. 지난 주 남원의료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봤는데 네번째와 다섯번째가 좋지 않은 것 같단다. 더 자세한 것은 엠알아이를 찍어봐야 한단다. 아내는 그냥 돌아왔었다.

나이를 먹는 일이 가끔은, 아주 가끔은 두려운 생각이 든다. 험한 병에 걸리거나 둘 중 하나가 짝을 잃어 외로운 삶을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장 크게 자리잡는다. 젊어서 벌어둔 돈이 없으니 그것도 걱정이고, 밥맛을 잃어 반 공기로 끼니를 넘기는 아내의 건강도 걱정이다.

걱정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마는 늙수구레한 부부가 이처럼 나란히 누워 새벽 빗소리도 듣고, 이야기를 속삭이는 시간이 있는 한 걱정 뿐인 삶만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하는 이여, 오늘 아침은 밥을 한 공기 가득 맛있게 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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