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향교와 서계서원을 찾아서

공부, 쉽게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정유년 한 해 동안 나름 공부 열심히 하리라 다짐하면서도 쉽게 할 방법은 없는지 요령을 찾는다. 조선 시대 국‧사립 학교인 향교와 서원을 찾아 숨은 비법이 없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향교는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국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다.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은 고을마다 하나의 향교(1읍 1교)를 설립 공자의 유교상을 가르쳐다. 최상위 국립대학인 ‘성균관’이다. 서원은 지역 유림에 의해 건립된 사립교육기관으로 성현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친다.

 

▲ 산청군 산청읍 전화국 뒤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산청향교가 나온다.

 

‘공부하는 왕도’를 찾아 섣달그믐인 1월 27일 집을 나섰다. 공부법을 핑계로 2016년 한 해 동안 고생한 나를 위로해주며 ‘쉼표’를 찍고 싶었다.

산청군 산청읍 전화국 뒤편 골목으로 들어가 빈터에 차를 세웠다. 모퉁이 구멍가게에 붙은 공중전화통에는 전화기가 없다. 신발이며 잡동사니가 똬리를 틀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붉은 홍살문이 보인다. 산청향교다.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가 옆에 서있다. 존경심의 표시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마비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 산청향교 홍살문 앞에서 예를 갖추려고 애쓸필요는 없다. 홍살문 옆에서 햇살에 샤워하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위엄에 절로 마음을 잡는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멋지게 반기는 경남 산청향교

산청향교 홍살문 앞에서 예를 갖추려고 애쓸필요는 없다. 홍살문 옆에서 햇살에 샤워하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위엄에 절로 마음을 잡는다. 산청향교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한 산 증인인양 우뚝 서있다. 어제와 오늘이 공존한 느낌이다.

은행나무를 한참 들여다보자 고양이 한 마리 슬그머니 지나간다. 향교 앞 안내판을 읽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 산청향교의 정문이 욕기루 앞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안내판을 읽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향교는 옛 성현을 받들며 지역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 교화를 목적으로 고려 시대부터 설립돼 조선말까지 지방 교육의 중심이었다. 산청향교는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55년(영조 31)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 산청향교

 

향교는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일직선을 축으로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생활공간인 동‧서재(東西齋)가 있다. 뒤쪽에는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 산청향교 명륜당에서 바라본 정문인 욕기루와 산청읍내

 

이곳 산청향교는 어떤 까닭인지 명륜당과 대성전이 일직선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흔히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공자 위패를 중심으로 좌우에 공자의 제자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세우는 건물인 동‧서무(東‧西廡)가 없다.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곳에서 쉼표 하나 찍다

입구에는 정문에 해당하는 욕기루(浴沂樓)가 있는데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라 한다. 동재에는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는 막걸리와 부침개가 흥을 돋우고 있다.

 

▲ 산청향교 동재에는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는 막걸리와 부침개가 흥을 돋우고 있다.

 

명륜당 앞에는 여름에 피는 석류나무가 심겨 있다. 명륜당 대청마루에 앉아 읍내를 내려다보았다. 꽃봉산이 보인다. 명륜당 뒤편으로 ‘ㄴ’자 모양으로 꺾여 있는 계단을 따라 대성전으로 향했다.

 

▲ 산청향교는 명륜당 뒤편으로 대성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ㄴ’자 모양으로 꺾여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내삼문 앞에도 100년은 넘은 듯한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삼문에서 고개 돌려 읍내를 보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읍내 풍광이 들어온다. 대성전 앞에는 ‘도깨비바늘’들이 사람이나 동물에 붙어 새로운 곳으로 여행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 산청향교 내삼문에서 바라본 읍내 풍광

 

대성전을 나와 명륜당을 지나 홍살문 옆 은행나무 아래에 앉았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묵은 고민을 나무에게 털어놓았다. 잠시 '쉼표'를 찍었다. 나무에 기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져간 캔커피를 마셨다. 달싸름한 커피가 목을 타고 들어가 2016년 한 해 동안 고생한 나를 위로한다. 햇살이 내 위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문득 각박한 현실에서 순간 이동으로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다.

산청향교를 나와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서계서원을 향했다. 쌩~쌩, 쉼 없이 바람을 가르며 나름의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는 차 소리가 저만치 들린다. 국도 3호선이 아주 가깝다. 서계서원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떡메산’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흙 언덕이 있다. 불과 홍살문에서 15m 거리에 이런 흙 언덕이 떡하니 버티는 까닭이 궁금하다. 마을 사람은 원래 지나가는 길인데 경지 정리 등으로 길이 바뀌면서 그렇다고 하는데 언덕 위에 푸른 소나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공부에는 '왕도'는 없지만, 방법은 있다

 

▲ 왕도는 없지만,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을 찾아 경남 산청군 산청읍 서계서원을 1월 27일 찾았다. 산청읍 입구인 쌀고개에서는 잘 보이지만 막상 서계서원으로 찾아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진주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국도 3호선 밑 굴다리를 지나야하기 때문이다.

 

왕도는 없지만,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을 찾아 경남 산청군 산청읍 서계서원을 1월 27일 찾았다. 산청읍 입구인 쌀고개에서는 잘 보이지만 막상 서계서원으로 찾아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진주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국도 3호선 밑 굴다리를 지나야하기 때문이다. 산청교육지원청에서 진주 방향으로 50m 정도 가면 KBS산청중계소와 아이사랑 어린이집 등의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서원이 나온다.

 

▲ 서계서원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떡메산’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흙 언덕이 있다. 불과 홍살문에서 15m 거리에 이런 흙 언덕이 떡하니 버티는 까닭이 궁금하다.

 

홍살문에서 한참을 흙 언덕을 보다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서계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이 나온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 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선생을 모신 곳이다.

 

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모신 곳이다.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수제자다. 오건 선생은 서른 살에 남명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지극한 효자였던 선생이 열한 살 때 부친상을 시작으로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였다. 스물 입곱 되던 해 복을 시묘살이에서 벗어났다. 서계서원 편액 아래 처마에 앉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 덕계 오건 선생은 열한 살 때 부친상을 시작으로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였다. 스물 입곱 되던 해 복을 시묘살이에서 벗어났다. (사진은 선생을 모신 서계서원)

강당 뒤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덕사로 올라갔다. 창덕사 옆에는 향나무와 배롱나무가 햇살에 샤워 중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선생을 떠올렸다. 선생은 “너는 글을 열심히 읽어 집안을 일으키고 나아가 나라에 쓰일 큰 인물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법 조선 시대 덕계 오건 선생에게 배우다

<중용>을 무려 1000번이나 상중에 읽었다고 전한다. 중용에 나오는 작은 주석까지 송두리째 외울 뿐 아니라 내용까지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읽고 또 읽어 뜻을 깨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는 선생의 공부법은 요즘의 학생들에게도 좋은 공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 읽고 또 읽어 뜻을 깨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는 덕계 오건 선생은 <중용>을 무려 1000번이나 상중에 읽었다고 전한다. (사진은 덕계 선생을 모신 서계서원)

 

덕계선생은 1558년 (명종 13)에 과거에 급제했다. 선생은 선조 5년에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이조정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천거법’에 따라 후임에 김효원을 천거했다. 그러나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외척 심의겸이 선례에 없는 반대에 나섰다. 이조전랑 천거로 불거져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생은 정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동재 옆 덕천재 마루에 앉아 실천하는 유학을 가르친 남명 조식선생과 덕계 선생의 각별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덕산에 자리 잡은 남명 조식 선생을 뵈러 덕계 오건이 찾아왔다가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는데, 작별을 못내 아쉬워하던 남명이 10리 밖까지 배웅했다. 스승의 전별주에 취한 오건은 말에서 떨어져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남명이 덕계에게 전별주를 대접했던 나무 아래를 송객정(送客亭)이라 부르고, 덕계가 말에서 떨어져 이마를 다친 곳을 면상촌(面傷村)이라 부르게 되었다.(<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중에서)‘

 

▲ 서계서원 근처에 있는 덕계 오건 선생의 묘.

 

덕천재 옆 담장 사이로 난 작은 문을 통해 신도비를 지나 산으로 20m 정도 올라갔다. 선생의 묘가 있다. 함양 오씨 산청 종중 합동 제단 왼편에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의 묘에 묵례한 뒤 읍내를 바라보았다.

 

▲ 덕계 오건 선생의 묘 근처 산길을 걸으며 ‘머리가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쉽게 내뺏은 나 자신을 반성했다. 올해 목표로 세운 공부, 읽고 또 읽어 깨칠 때까지 해보자 다짐했다.

 

묘를 나와 산길을 따라 서원 뒤편까지 천천히 걸었다. 가난과 10여 년의 상중(喪中)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은 덕계 오건 선생의 공부하는 의지와 공부법에 용기를 얻었다. ‘머리가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쉽게 내뺏은 나 자신이 부끄럽다. 올해 목표로 세운 공부, 읽고 또 읽어 깨칠 때까지 해보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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