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냉정리 이정표석

희망을 노래하는 1월. 희망과 함께 더 나은 한 해를 다짐하는 마음을 영원불멸한 돌에 새기고 싶었다. 1월 24일, 돌이 돌로 보이지 않는 돌을 찾아 나섰다.

급할 것 없는 마음에 경남 진주시 하대동 남강 강변도로를 따라 진주농수산물도매시장에 차를 세웠다. 강변도로를 건너 강둑으로 갔다. 청둥오리, 독수리, 백로 등이 어우러져 겨울을 난다. 

 

▲ 진주 하대동 남강둔치 억새밭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 등 뒤로 남강물에 반짝이는 햇살이 함께한다.

 

억새밭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 등 뒤로 남강물에 반짝이는 햇살이 함께한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청둥오리 한 무리가 푸드덕날갯짓하며 강을 박차고 거슬러 올라간다. 한 무리가 지나자 다시금 반대 방향으로 한 떼의 청둥오리가 경쟁이라도 한 듯 날아오른다. 쇠백로 한 마리 그저 저 갈길 부지런히 흰 날개바람에 맡겨 푸른 빛을 배경으로 산 너머로 날아간다.

 

▲ 문득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독수리 여러 마리 난다. 두 팔을 한껏 양옆으로 벌린 듯 쭉 뻗어 직선을 만들고 날아간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제 몸을 맡긴 모양새가 여유롭다.

 

문득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독수리 여러 마리 난다. 두 팔을 한껏 양옆으로 벌린 듯 쭉 뻗어 직선을 만들고 날아간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제 몸을 맡긴 모양새가 여유롭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편대를 이룬 듯 하늘을 나는 녀석들이 부러웠다. 독수리 여러 마리가 하늘을 날아도 까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래를 종종거리듯 날아다닌다. 독수리에 덧씌워진 이미지와 다른 풍경에 놀랐다. 하늘 향한 고개가 아프도록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독수리들의 희망가를 엿듣는 기분이다.

 

▲ 진주시 하대동 남강 둔치는 도심 가까이에서 겨울 나는 새들을 구경할 수 있다.

 

도심 가까이에서 겨울 나는 새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에 억새밭을 걸었다. 내 머리 위에서 푸른 바다를 한껏 헤엄치는 녀석과 함께 걷는 기분은 강바람이 차가운지 잊었다. 얼마를 거닐고 다시 둑으로 올라와 차를 세운 길 건너로 가려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붉은 남천 사이로 삼각형 조형물이 빛나는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앞에 섰다. 6·25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우리 고장의 영웅을 기리는 전공비다. 수훈자 이름이 조형물 뒤편에 새겨져 있다. ‘~꽃들이 아름답다 하여/ 님들이 보인 충절보다 향기로울까//겨레와 나라의 영원한/ 강물이여/ 님들의 무공과 충절로 하여/ 더 깊고 더 푸르리니~’ 강희근 시인의 헌시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고개 숙인다.

 

▲ 진주시 농수산물시장 앞 남강 둔치에 있는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33국도를 타고 가다 장흥 교차로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자 전국에서 유명한 우물이 있는 찬새미 마을 덕분에 차갑고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냉정리(冷井里) 마을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다. 5km가량 들어가자 흙을 뚫고 나온 듯 하늘 향한 돌을 만났다. 왕복 4차선의 빠른 길에서 잠시 벗어나 숨겨진 보물, ‘진주 냉정리 이정표석’이다.

 

▲ 진주에서 합천가는 33번 국도에서 장흥교차로를 빠져나오면 전국에서 유명한 우물이 있는 참새미 마을 덕분에 차갑고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냉정리(冷井里)가 나온다.

 

선돌 앞 안내판에는 ‘진주에서 북으로 20리 떨어져 있다(晋州北拒二十里)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양 가는 길을 안내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한다’고 적혀 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천태산 마구 할머니가 진주성을 쌓기 위해, 바위 3개를 머리에 이고, 지팡이로 짚고, 치마에 담아 가져오다가, 진주성이 다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팡이로 짚고 오던 바위를 여기에 꽂아놓았다.’고 한다.

 

▲ 마고 할미의 전설이 깃든 진주 냉정리 이정표석

 

제주 설문대할망과 같이 태초에 이 세상을 만든 창조 여성 거인 신(神)인 마구 할미의 흔적을 여기서 만나 반갑다. 이끼 낀 돌을 만지자 차가워 얼른 손을 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주와 사천 경계에 있는 두문리 석계마을 ‘돌곶이’ 또는 ‘돌꽂이’라 불리는 돌장승에 깃든 마고 할미의 전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마고 할미의 전설이 깃든 진주 냉정리 이정표석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진주 옛이야기>에 따르면‘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 더 오래전에 힘이 장사인 마고 할미가 살고 있었단다. 자꾸 물레가 흔들려 물레 눌러 놓을 돌을 찾으러 멀리 동해에서 돌 3개를 구했다. 하나는 머리에 이고, 길쭉한 돌은 지팡이로 삼고, 마지막 하나는 치마폭에 싸서 가져왔다. 오다가 머리인 돌과 지팡이로 짚고 오던 돌이 너무 작아 도중에 두 개를 버리고 치마에 싸 오던 큰 돌만 두문리까지 가지고 왔단다. 마고 할미가 버린 돌들은 사천읍 구암 마을 앞에 서 있고, 가지고 온 돌이 돌곶이 고개에 꽂힌 바위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마고 할미 물렛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진주 명석면에는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2호인 운돌 한 쌍은 남자 거시기와 여자의 족두리를 닮은 자웅석(雌雄石)이 있다. 남자 거시기를 닮은 돌의 높이가 97cm, 둘레 214cm다. 족두리를 닮은 돌은 높이 77cm, 둘레 147cm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立石)이다.

 

진주성 쌓으러 간 돌 이야기는 인근 명석면(鳴石面) 운돌과 닮았다.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2호인 운돌 한 쌍은 남자 거시기와 여자의 족두리를 닮은 자웅석(雌雄石)이다. 남자 거시기를 닮은 돌의 높이가 97cm, 둘레 214cm다. 족두리를 닮은 돌은 높이 77cm, 둘레 147cm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立石)이었다. 이 돌이 우는 돌(鳴石)이 된 까닭은‘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광제암의 스님이 성 보수를 마치고 돌아가다 저만치에서 서둘러 걸어가는 돌을 만났다. 돌에게 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더니 진주성을 쌓는데 밑돌이 되기 위해 간다고 했단다. 스님은 이미 공사가 끝나 소용없다고 했더니 돌은 진주성의 밑돌이 되지 못한 게 서러워 크게 울었다. 스님은 돌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큰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 진주 이반성면 경남수목원을 근처 대천리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77호인 선돌이 있다. 시멘트 농로를 사이에 두고 약 70m 간격을 둔 두 개의 바위는 국도 가까운 쪽이 여자 바위고 건너가 남자 바위다.

 

이 밖에도 경남수목원을 근처 대천리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77호인 선돌이 있다. 시멘트 농로를 사이에 두고 약 70m 간격을 둔 두 개의 바위는 국도 가까운 쪽이 여자 바위고 건너가 남자 바위다. 여자 바위는 밑바닥이 넓고 남자 바위는 키가 크다. 드넓은 들판을 바둑판처럼 경지 정리를 하면서도 돌을 치우지 않았다. 무병장수를 비는 영험함이 깃든 이 돌은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석기와 청동기 시대 권력자의 무덤이기도 한 고인돌과 같은 큰돌 문화의 하나인 선돌(立石)은 묘의 영역을 나타내기도 하고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산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이 아시면 뭐라 하실지 모르겠다. 돌보기, 이제는 황금 보기처럼 소중하게 해야겠다. 가치 없는 돌은 없다. 가치를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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