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경남 진주까지...1개월 동안 전단지 뿌리며 가족을 찾아 수소문

"제 이름은 Suzy Batteau입니다. 한국이름은 '김숙희', 1975년 (또는 1977년) 5월 13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는 1983년 5월 13일 오후 2시경에 경남 진주시 장대동 길가에서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뇌성마비로 인해 다리 한쪽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30여년 만에 그녀가 왔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찾기 위해 경남 진주에 찾아왔다. 하지만 경남 진주는 경찰이 그녀를 발견한 첫 장소일 뿐. 그녀의 고향이 진주인지 어딘지, 그녀는 왜 이곳에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녀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 부모님과 가족을 찾기 위해 만든 전단지, 이 전단을 붙이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1983년 당시 경찰에게 발견된 후, 그녀는 창원에 있는 ‘홍익재활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아리아나(한국명: 안영숙) 선교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녀는 홍익재활원에서 처음으로 ‘글자’들을 익히고, 불편한 다리로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이 난다고 했다.

수지가 홍익재활원에서 약 7개월 간 지낼 즈음이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양부모는 ‘홍익재활원’에 봉사활동을 인연으로 ‘수지’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의 양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Batteau 부부는 그녀를 입양했고, 그녀의 부모가 됐다. Batteau 부부는 부모를 잃은 수지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입양의 뜻을 품었다고 했다. 그녀는 양부모와 함께 부산에서 4년 정도 머물렀다.

1988년 그녀는 그녀의 양부모와 함께 네덜란드로 갔다. 이때가 나이 10세 쯤으로 추정된다. 

▲ 8월 30일 수지씨와 마크가 함께 한국을 찾아왔다. 둘은 연인사이이며, 네덜란드 입양아 모임'아리랑'에서 만났다.사진제공: Suzy Batteau

지난 8월 30일 수지는 그녀의 남자 친구 마크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둘은 연인사이이며, 네덜란드 입양아 모임'아리랑'에서 만났다고 한다. 

수지에게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2명의 여형제들과 남동생들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입양에 대해 얘기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들 틈에서 너무도 선명한 검정빛 머리카락을 가진 저의 모습이었죠."

"나의 검정 머리칼은 누구로부터 왔을까?, 나는 어디서 와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나의 정체성을 향한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어요’.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의 ‘조건 없는 사랑’ 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되었어요."

수지와 마크, 두 사람은 지난 5일부터 진주에 머무르며 친부모를 찾고 있었다. 그녀와 마크는 전단지를 만들어 진주중앙시장, 진주 장대동 시외버스주차장 등 시내를 일일이 돌며 전단지를 붙이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 그녀가 '고아'로 발견되었던 장대동 시외버스 주차장. 가판대 주인이 붙여준다.(사진제공 :Suzy Batteau)

 

"나중에 엄마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해서 진주, 장대동 길가에 혼자 있게 되었는지, 혹은 내가 한눈을 팔다, 엄마 손을 놓치게 되었는지, 가족들과 부모들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고,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계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띄엄띄엄 이어졌고,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녀는 담담했고 밝았다. 눈물을 비치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에 되레 먹먹해지는 듯했다.

수지는 친 가족과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입양아 모임 ‘아리랑’에서 ‘뿌리의 집’(해외 입양인 전문 게스트 하우스) 등 입양부모 찾기 등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부모 찾기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고 했다.

▲ 수지의 수첩에는 빼곡한 글씨들이...가족을 찾기 위해 메모하는 것들로 보인다.

그녀의 가족찾기는 남자친구 마크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본다. 인터뷰 당시에도 마크는 혼자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하기 위해 어느 장소에 있는 확인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마크는 뇌성마비로 걸음이 불편한 그녀를 위해 때로는 휠체어를 밀고, 휠체어를 옮기는 등 그녀의 손과 발이 되었다. 그녀가 피곤해 움직이지 못할 때도 혼자서 진주 시내를 돌며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녀의 가족찾기의 간절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8일 인터뷰 당시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누군가 포스터를 붙어도 다들 무관심한데, 한국인들은 저에게 말도 걸어주고, 함께 붙어 주기도 해요. 그들의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져요."

고국이, 고향 사람들이 그녀에게 무심하지 않았음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처음 맛보는 한국 음식들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했다.

"한국 음식 중에 ‘불고기’를 가장 좋아해요, 네덜란드 음식은 맵지 않은데, 매운 김치 맛에 반했어요.‘

머리가 기억하지 못한 '한국의 맛'을 그녀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9일 아침 그녀는 진주를 떠났다. 10일까지 창원, 부산, 제주, 서울로... 또 전국을 돌아다닐 계획이다. 그녀의 부모와 가족들을 찾는 전단지를 붙이는 여정은 9월 30일까지 계속될 것이다. 수지에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40년 만에 '핏줄'을 찾는 그녀의 여정에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