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김준민 장군 신도비’에서 나라 사랑의 결기를 느껴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 일본인들은 몰랐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몰라서는 안 되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김준민 장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3월 30일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로 향했다.

▲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 충의각 안에는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사진은 마을 입구.

진주에서 옛 마산으로 가는 ‘진마대로’를 타고 가다 월성 교차로 지나 발산리에서 빠져나오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발산리는 진주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발산고개를 경계로 진주와 창원이 나뉘는데 발산저수지 아래에 팔작지붕의 기와집인 충의각(忠義閣)이 있다. 충의각 안에는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가 있는 비각.

발산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내동마을 시내버스 정류장을 사이에 둔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한달음에 달려온 나 자신을 추스를 겸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세웠다. 정류장 한쪽에는 유모차와 지팡이들이 놓여 있다. 어르신들의 이동 보조 수단인 셈이다. 삼거리에서 다시 마을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 각’이 나온다.

꽃까치꽃과 제비꽃, 냉이꽃 등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하얗고 노란, 보랏빛 들꽃 사이를 지나 비각 앞에 섰다. 하얀 냉이꽃과 하얀 민들레가 장군의 넋을 달랜다. 문은 닫혀있지만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안으로 들어가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가 있는 비각문은 닫혀있지만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안으로 들어가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왼편에 쓰인 안내문에는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크게 공을 세우고 전사한 김준민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장군의 신도비로서 1918년 비각과 함께 세웠다.’ 라고 적혀 있다. 왜적을 크게 무찌른 장군의 신도비와 비각이 일본 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이 비를 세웠다니 놀랍다.

▲ 2.5m가량의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은 진주성 벽화 등이 둘러싸고 있다.

김준민 장군은 1592년(선조 25)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 휘하의 거제 현령으로 재직 중이었다. 장군은 원균이 병선을 자침하고 도망칠 때도 거제성을 지켰다.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으로 성을 비우고 출전하자 왜적이 거제성을 함락시켰다. 거제를 잃은 장군은 합천의병장으로 7월 무계, 9월 성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0월, 김시민 장군을 도와 진주성 1차 전투의 빛나는 진주대첩을 이끈 분이다. 1593년 6월, 10만 왜적의 총공격 속에 고립무원이었던 진주성에 입성, 진주성 동문을 지키다 전사했다. 사후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추대돼 현재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로 추증받았다. 현재 진주성 창열사(彰烈祠)에서 넋을 기리고 있다.

▲ ’증 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贈刑曹判書金俊民神道碑)’은 1919년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유림의 서명을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탄원서(獨立歎願書)를 보낸 장서사건의 주역인 면우 곽종석 선생이 지었다.

들꽃들을 사뿐히 지르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층층이 쌓인 돌담이 둘러싼 충의각 문을 열자 2.5m가량의 큰 신도비가 우뚝 서 있다. 진주성 등을 그린 벽화 사이로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면우 곽종석 선생이 지었다. 면우 곽종석 선생은 구한말 유학자로 1919년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유림의 서명을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탄원서(獨立歎願書)를 보낸 장서사건의 주역이다.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서슬퍼린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에 왜적을 무찌른 장군의 신도비를 세우고 비문도 독립운동가가 썼다니⋅⋅⋅.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비와 어휘각을 폭파하고 글까지 파내려 했던 일제가 아닌가. 인근 용암리에 있는 충의사 정문부(鄭文孚:1565∼1624) 장군의 북관대첩비도 일본으로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의 한구석에 처박은 만행을 알기에 더욱 전율이 솟았다.

▲ 신도비를 여의주를 앙다문 거북이가 받친다. 투박한 거북이의 어금니가 귀엽고 우습다. 거북이 아래는 시멘트에 파묻혔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이 비각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았으면 이 신도비와 비각은 현재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점령기도 끝났지만, 그때의 일본인처럼 우리도 현재 이 신도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짧은 한자 실력으로 신도비를 드문드문 읽어내러 간다. 신도비 앞에서 고개 숙여 묵념한다. 신도비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장군의 결기를 느낀다. 신도비를 여의주를 앙다문 거북이가 받친다. 투박한 거북이의 어금니가 귀엽고 우습다. 거북이 아래는 시멘트에 파묻혔다.

▲ 발산저수지.

충의각을 나오자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배나무밭에서 쑥을 캐는 모습이

정겹다. 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저수지 안쪽 먼당으로 들어가면 절이 두 개나 있다고 자랑하는 할머니의 소개에 저수지를 건넜다. 보랏빛 밥알같이 생긴 꽃들이 알알이 박힌 박태기나무들이 환하게 저수지 둑 입구를 빛낸다. 박태기나무 옆에는 ‘반사정’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도 있다.

▲ 상산 김씨의 재실인 ‘반사정(反思亭)’ .

좁다란 길을 달려 좀 더 들어가면 솔숲과 대나무가 우거진 마을 입구 언덕 위에 상산(상주) 김씨 재실인 ‘반사정(反思亭)’ 나온다. 반사, 생각을 돌이켜 본다는 일종의 반성하자는 뜻이다. 무엇을 돌이켜보자는 말일까. 재실로 올라가자 집현문이 나온다. 반사정은 몸채과 문간채로 구성된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모든 일에는 작거나 큰 것을 따지지 말고, 열 번을 돌아보고, 열 번 생각하여 선조의 열렬함을 떨어뜨리지 말고, 후손에게 넉넉함을 내려주면, 어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한 일이 옳지 않겠는가?- 김인섭의 반사정기 중에서(『진주의 누정문화』)”

모든 일에 작거나 큰 것을 따지지 말고, 생각하고 생각하자 다짐하면서 문득 장군의 둘째 아들 김봉승 선생이 떠올렸다. 김봉승 선생은 1597년, 왜가 진주로 진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수백의 의병과 함께 발재(현재의 발산리)에 토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다. 패주하는 왜적을 추격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자가 함께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이 역사의 현장을 우리는 제대로 보존하고 가꿀 의무가 있지 않을까. 장군의 신도비 옆에 아들의 신도비도 나란히 세워 더불어 넋을 기렸으면 한다.

▲ 김준민 장군의 둘째 아들 김봉승 선생도 발재(현재의 발산리)에 토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다. 패주하는 왜적을 추격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오늘날 발재는 길(진마대로)이 뚫려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 일본인들이 몰라서 현재에 이른 우리의 역사 현장을 우리가 모르면 우리 미래는 없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이곳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가슴으로 배우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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